데저트 플라워 Desert Flower (2009)

2010.04.10 09:44

DJUNA 조회 수:6619


와리스 디리는 소말리아 출신의 패션 모델입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해요. 소말리아 평원에서 유목민의 딸로 살다가 중매결혼을 피하기 위해 런던으로 달아났죠. 거기서 맥도널드 가게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사진작가에 의해 발탁되어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답니다. 97년, 디리는 [마리 클레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었던 여성할례 경험을 털어놓았고 그 이후로는 모델 일을 관두고 여성할례에 맞선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디리는 이후 자신의 인생을 다룬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 첫 권이 바로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사막의 꽃]입니다.


멋진 소재가 아닙니까? 사막에서 양을 치고 살던 아프리카의 소녀가 세계적인 탑스타가 되었으니 이건 신데렐라 이야기입니다. 그 주인공이 어린 시절 겪었던 수난과 그에 맞선 투쟁을 보면 이건 페미니스트 드라마입니다. 이 중 하나만 골라도 좋은 영화 한 편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좋은 소재들이 있다고 이것들을 무턱대고 다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엔 꼼꼼한 선정과 편집이 필요해요. 그리고 셰리 호르만의 이 영화는 거기에서 거의 완벽하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디리의 어린 시절을 다룬 도입부는 제3세계 여성 인권을 다룬 사회고발물처럼 보입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디리가 영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고 단짝 친구 마릴린을 만나게 된 80년대로 건너 뜁니다. 여기서부터는 영화는 갑자기 여성 버디 코미디물로 전환합니다. 그럴 수 있다고 칩니다. 하지만 디리가 패션 모델로 발탁된 뒤에 벌어지는 모델계 뒷이야기부터는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할 생각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 뒤로도 영화는 와리스 디리 인생의 특정시기가 나올 때마다 그에 맞는 장르를 골라 끼워넣는데, 도대체 일관성도 논리도 없습니다.


일관성과 논리에 대해 보다 깊이 이야기해보죠. 우선 영화가 다루는 두 소재를 생각해보죠. 패션계 신데렐라 이야기와 제3세계 여성인권을 다룬 페미니스트 이야기는 모두 좋은 소재지만 둘은 그냥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공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주제의 조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그냥 생각이 없어요. 신데렐라 이야기는 신데렐라 이야기이고 제3세계 여성 이야기는 그냥 제3세계 여성 이야기인 겁니다. 논리는 더 엉망입니다. 예를 들어 디리가 맘에 드는 남자를 찾아가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짤막한 드라마가 하나 벌어지고 그건 로맨스 장르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디리가 마리 클레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영화가 다 이런 식입니다. 암만 봐도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냥 와리스 디리의 인생이 의미 없이 토막난 채 자루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영화가 소재를 다루는 방식도 수상쩍습니다. 특히 시대 묘사는요. 80년대 중반 런던이 시대배경이어야 할 영화 장면에 거킨 빌딩이 나온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고증 실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영화는 그냥 고증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 증거로 디리가 패션쇼 장면에 입고 나오는 옷들은 디리 시대와 전혀 관계가 없지요. 보도자료를 읽어보니 만든 사람들은 시대극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니, 엄연히 현대사의 구체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전기 영화를 만들면서 어떻게 그걸 무시할 수 있지요? 그리고 패션모델들은 그 누구보다 특정 시기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배우들은 괜찮습니다.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줄리엣 스티븐슨과 같은 좋은 배우들이 뒤에서 진을 치고 있지요. 디리 역의 리야 케베데는 그들 사이에서 다소 경직되어 있지만 바로 그게 캐릭터이니 문제 될 것은 없죠. 단지 이들에게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재료가 없습니다. 디리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드라마를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죠. 그 재료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10/04/06)


★☆


기타등등

이 영화가 저에게 주는 분명한 교훈은 아무리 험악한 환경에서도 예쁜 사람들에겐 추가 기회가 더 주어진다는 것이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감독: Sherry Horman 출연: Liya Kebede, Sally Hawkins, Craig Parkinson, Anthony Mackie, Juliet Stevenson, Timothy Spall, Meera Syal, Soraya Omar-Sc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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