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2010.04.22 14:21

DJUNA 조회 수:11947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박흥용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삼았지만,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영화가 주인공으로 삼은 네 명의 사람들은 캐릭터와 상황이 모두 다르고 그들이 맞는 운명도 모두 달라요. 고로 원작팬들은 많이 실망할 겁니다. 바뀐 설정에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을 걸요. 하지만 이건 이준익의 의도일 겁니다. 이 영화는 작정하고 사람들을 자극하는 컴컴한 농담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요? 만화는 젊은 백수 주인공 견자가 맹인 검객 황정학을 스승 삼아 성장해가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견자는 3번째 주인공 정도로 축소됩니다. 대신 원작에서는 비중있는 단역에 불과했던 이몽학의 비중이 커졌어요. 그와 함께 당시 정치 묘사도 늘어났고요. 원작에는 없는 선조와 신하들의 이야기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모든 주인공들의 동기도 그 역사에 귀속됩니다. 황정학은 이몽학을 막으려 하고 견자는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이몽학에게 복수하려 하며... 어, 기생 백지는 이몽학이 버린 여자친구였네요.


영화에서 가장 튀어보이는 것은 대사입니다. 이준익은 이 영화에서 사극 대사를 완전히 포기했어요.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재벌2세가 나오는 현대배경의 연속극 캐릭터들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예의는 처음부터 벗어던졌고 궁 안에서도 상대방을 반말로 부르기 일쑤죠. 심지어 왕도 그렇습니다. 하긴 선조역으로 안경벗은 김창완이 나오는 영화이니 역사의 진지한 재현을 기대하는 건 웃기는 일이겠지요. 이런 대사들은 그 자체로 스타일이 되어버리는데, 재미있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역사의 진지한 재현이라... 이 영화는 이야기를 위해 역사를 상당 부분 고쳐쓰고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예고만 되고 끝났던 이몽학의 난이 임란 초기에 이미 일어나 버리죠. 이 개작은 영화 후반에 나오는 특정 극적 장면의 배경을 위한 것인데, 역사 전체의 흐름과 그렇게 잘 맞는 편이 아니라 다소 어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역사를 반쯤 접고 본다면 영화의 마지막 액션의 무대를 제공하는 텅 빈 궁궐은 효과적인 장치입니다.


위에서 전 이 영화가 작정하고 사람들을 자극하는 컴컴한 농담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이런 뜻입니다. 박흥용의 원작만화는 모든 캐릭터들을 존중했고 그들의 꿈을 진지하게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이준익은 이들을 모두 파괴해버립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만의 꿈을 추구하긴 합니다. 그게 복수건, 정권찬탈이건 간에요. 하지만 영화의 후반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 꿈들은 철저하게 무의미합니다. 이 더럽고 치졸한 역사 속에서 주인공들은 아무 것도 못 이루고 허무 속에서 이야기를 끝낼 수밖에 없었어요. 이 바닥을 친 비관주의는 우리가 지금 끌려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역사적 흐름과도 관계 있겠지요. 이준익의 사극은 언제나처럼 과거보다 현재를 이야기하니까요.


영화는 이준익이 전에 만들었던 두 편의 사극들보다 기술적으로 잘 다듬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영화에서 고유의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필요한 걸 끌어썼다고 보는 게 낫겠죠. 칼잡이 영화이니 액션 장면에 기대가 크실 텐데, 그렇게 튀는 장면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준익의 장점은 비주얼이나 액션보다 스토리텔링에 있지요. 이번 경우에도 영화의 페이스는 아주 좋은 편입니다. 단지 전작들만큼 캐릭터에 몰입하기는 어려운데, 감독이 그걸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 어쩌겠습니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원작이나 이준익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찐한 인간 드라마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화화 소문을 듣고 기대하셨을 법한 원작의 스펙터클도 포기하세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 영화에서 황정민의 훌륭한 캐릭터 연기를 보실 수 있고,  폭탄 맞은 것처럼 원작의 파편들이 나뒹구는 폐허 위에서 음산하게 웃어대는 듯한 영화의 야비한 농담을 그냥 지나치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관객들 맘이지만요. (10/04/22)


★★★


기타등등

차승원의 송곳니는 의치입니다. 캐릭터의 야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넣었다고 합니다만. 


감독: 이준익 출연: 황정민, 차승원, 한지혜, 백성현 다른 제목: Blades of Bl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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