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번가의 연인 84 Charing Cross Road (1987)

[84번가의 연인]은 그렇게 정확한 번역제목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84번가의 비밀문서]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었는데, 이것도 내용과는 거리가 멀고요. 한쪽은 로맨스 영화로, 한쪽은 첩보물로 영화를 포장하고 있는데, 둘 다 아니거든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야기예요. 헬레인 햄프라는 뉴욕의 무명 작가가 마크스 상회라는 런던의 고서점으로부터 희귀도서들을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서점의 지배인인 프랭크 도엘과의 편지 교환이 거의 20년 가까이 이어졌지요. 하지만 햄프가 런던을 방문하기 전에 도엘은 사망했고 두 사람은 끝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햄프는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두 사람이 교환했던 편지를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 출판했고 결국 이게 햄프의 대표작이 되었지요. 이 책은 나중에 연극으로 각색되었고 결국 앤 밴크로프트,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어요.

대부분의 서간집이 그렇듯, [채링크로스 84번지]도 완벽하게 영화화하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햄프와 도엘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언어의 영역에 속해있어요. 두 사람 모두 언어 안에서 매력과 개성이 가장 빛이 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다 조금씩 잉여지요. 이들의 이야기를 가장 온전하게 접하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입니다. 영화는 좀 이 책의 부록 같아요.

그렇다고 쓸데없는 부록이냐. 그건 아니예요. 아무리 편지를 직접 읽는 것이 좋다고 해도 그 편지를 쓰고 읽은 사람들은 모두 문자 저편의 현실 세계에 살았죠. 영화의 무대가 되는 20세기 중반의 뉴욕과 런던을 직접 보면 책의 문장들이 더 와 닿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우정을 연결해준 책들이 있잖아요. 낡고 먼지 뭍고 저번 주인이 자주 읽은 부분이 먼저 펼쳐지고 낙서가 되어 있는 낡은 책들. 서간집은 이 책들의 물성을 보여주지 못하죠. 오로지 영화만이 할 수 있습니다. (17/12/12)

★★★

기타등등
안소니 홉킨즈가 연기하는 도엘의 아내 역으로 주디 덴치가 나오더라고요. 전에 봤을 때는 몰랐고 지금까지 전혀 연결을 못 시켰어요.

감독: David Hugh Jones, 배우: Anne Bancroft, Anthony Hopkins, Judi Dench, Jean De Baer, Maurice Denham, Eleanor David, Mercedes Ruehl

IMDb http://www.imdb.com/title/tt009057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