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닐몽탕 Ménilmontant (1926)

2010.12.11 20:36

DJUNA 조회 수:9281


디미트리 키르사노프는 러시아 이민자 출신 첼리스트였습니다. 영화관에서 무성영화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직업이었던 그는 당시 아방가르드 영화를 만들던 패거리와 어울렸는데, 그러다보니 그들에게 물들어 직접 영화까지 찍게 되었다고 해요. 거의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조촐하게 만들었던 그의 영화들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그의 첫 아내였던 배우 나디아 시비르스카야였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메닐몽탕]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이고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쇼킹합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미치광이 살인마가 어느 부부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지요. 흉기가 살을 찢는 장면이 없을 뿐이지, 이 살인장면은 요새 호러와 견주어도 특별히 강도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부부는 죽고 살인마는 달아납니다. 아마 관객들은 이 영화가 끝나기 전에 이 살인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인과응보의 결말을 보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이 사건에 매달릴 생각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살인범도, 살해당한 부부도 아닙니다. 부부가 죽고 고아가 된 그들의 두 딸들이지요. 그리고 그 자매의 이야기는 살인사건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딸들은 살고 있던 시골집을 떠나 파리로 갑니다. 아마 그들이 정착한 곳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리 동북부의 달동네 메닐몽탕이겠죠. 여기서 그들은 직공으로 일하면서 푼돈을 벌며 살아가는데, 그만 두 사람 모두 행실이 불량한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다 동생은 임신해서 아기까지 낳지만 땡전한푼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지요. 네, 전형적인 20년대식 신파입니다. 당시엔 이런 이야기들로 포화상태였지요. 세상의 불운을 몽땅 뒤집어쓴 딱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 


키르사노프는 이 신파 이야기를 결코 평범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가 알고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을 총동원하지요. 초반 살인장면의 난폭한 몽타주는 당시 에이젠슈쩨인의 영화들과 맞먹습니다. 자매의 심리묘사에 동원되는 화면합성과 같은 트릭엔 아방가르드 냄새가 물씬 나는데, 정작 그들 주변의 지리적 환경은 인위적인 장식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다큐멘터리처럼 묘사됩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재료들은 모두 정신없이 흔들리는 헨드 헬드 카메라와, 민첩하기가 요새 웬만한 뮤직 비디오 뺨치는 민첩한 편집,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뚫고 있는 20년대의 시대정신 속에서 하나로 섞여 절묘하게 일관성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방가르드 신파영화는 방향과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꿈과 같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뻔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도입부의 살인장면을 무시하고 영화를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영화가 간신히 신파 공식의 결말에 도달할 무렵, 도입부와 거의 같은 강도의 폭력 장면이 하나 더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도입부보다 더 설명이 안 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막의 설명을 듣고 싶지만... 어쩌나요. 이 영화에는 자막이 없습니다. 37분 정도의 러닝타임 동안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전개되는 영화지요. 설명 따위는 개나 주라고 그래!


그러나 이 정신 나간 혼란 속에서도 주인공들의 감정과 심리묘사는 명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관객들은 남자를 만나러 떠난 동생의 빈 자리를 바라보는 언니나, 미혼모가 되어 동반자살의 유혹에 빠지는 동생의 마음 속을 대사나 설명 하나 없이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몇 분 동안 독심술사라도 된 기분이죠. 몇몇 장면은 거의 채플린 영화에서 따온 것처럼 순수합니다. 특히 굶주린 동생이 벤치에서 친절한 노인을 만나는 부분은요. 여기서 키르사노프는 불필요한 잔재주는 몽땅 스톱시키고 동생역의 나디아 시비르스카야의 얼굴에 집중하는데, 보면 두 가지 생각이 자동적으로 듭니다. (1) 와, 지금까지 이렇게 멋진 무성영화 배우를 모르고 있었구나. (2)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이 영화를 찍을 때 감독은 진짜로 아내를 사랑했구나.


키르사노프는 그 뒤로 경력을 유성영화 시절까지 끌어갔지만, 무성영화시절을 능가하는 영화는 만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무성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에게 드라마와 대사에 얽힌 유성영화는 갑갑하기 짝이 없었겠죠. 날개가 잘린 기분이었을 겁니다. (10/12/11)



기타등등

폴린 카엘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하더군요. 적어도 인터뷰에서 그렇다고 그랬답니다. 


감독: Dimitri Kirsanoff, 출연: Nadia Sibirskaïa, Yolande Beaulieu, Guy Belmont, Jean Pasquier


IMDb http://www.imdb.com/title/tt0147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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