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론: 새로운 시작 TRON: Legacy (2010)

2010.12.14 23:59

DJUNA 조회 수:12893


[트론]은 오로지 80년대에, 그것도 디즈니만이 만들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막 싹트기 시작했던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에 대한 열광과, 컴퓨터라는 기계로 실제 영화에 써먹을 수 있는 그래픽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디즈니 특유의 성급한 도전정신과 어우러져 관객들과 시장이 제대로 준비되기 살짝 전에 나온 작품이란 말이죠. 이 영화가 컬트가 된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와 그래픽은 당시엔 벽을 뚫고 부수는 혁명이었습니다. 선지자 중 선지자인 셈이죠.


그 때문에 스티븐 리스버거가 [트론]의 속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몇 년 전에 들었을 때, 전 '이게 과연 잘 하는 짓일까?'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미 우리는 [트론]을 넘어 [매트릭스]를 거쳤습니다. [트론]을 80년대 영화로 감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거의 30년 전 과거의 언어로 구성된 그 영화의 세계를 지금의 세계로 끌어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까요?


결국 나와버린 속편 [트론: 새로운 시작]을 보는 동안에도 저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케빈 플린의 아들 샘이 실종된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가상현실로 뛰어든다는 내용의 이 영화가 그리는 3D 그리드의 세계는 멋지구리하고 특수효과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원작이 가지고 있던 오리지널의 힘을 상당히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건 모두 그 좋은 특수효과 때문인 겁니다. 


어째서 그러냐고요? 이렇게 설명해보죠. [트론]이 가지고 있던 컴퓨터 그래픽의 기술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고, 이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은 그 한계를 스타일의 일부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기술과 스타일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죠. 하지만 [새로운 시작]은 훨씬 여유로운 환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라이트제트에서 나오는 연기를 그릴 수도 있고, 라이트바이크를 진짜 바이크처럼 몰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아니냐고요? 생각해보시죠. 라이트바이크가 진짜 바이크처럼 움직이면 그게 라이트바이크가 맞습니까? 더 좋은 컴퓨터 그래픽을 쓸 수 있다고 더 이상 감속없이 직각으로 꺾어지는 [트론] 세계만의 질주를 하지 않는다면 라이트바이크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런 식입니다. [새로운 시작]이 보여주는 새로운 그리드의 세계는 쿨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리지널 [트론]의 세계의, 거의 필사적이기까지 했던 진실성은 찾기 힘듭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과 기술들은 모두 [트론] 테마 파크나 파티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놀이공원에 사는 분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이맥스로 뻥튀기 된 화면 속에서 관객들은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배우들의 진한 마스카라, 깎지 않은 수염, 피부의 트러블. 심지어 그것들 중 일부가 진짜 CG이고, 오리지널 [트론]의 '디지털 세계' 상당 부분이 구식 광학 효과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전 계속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겁니다. 


내용은 어떤가. 오리지널 [트론]도 그리 좋은 각본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트론: 새로운 시작]의 각본은 더 나쁩니다. 영화는 전통을 따라 디지털 기술과 산업의 이야기를 게임 세계로 이식하려 하지만 원작만큼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엔 따라야 할 원작의 잔재가 너무 많죠. 별다른 갈등없이 얼렁뚱땅 요행으로 해결하려는 스토리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가지고 있는 재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ISO(Isomorphic Algorithms)의 개념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뻔한 소수자 박해 이야기의 재료로만 삼은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 나쁜 건 트론 캐릭터의 활용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직 [트론: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타이틀 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건 당연한 게 아닙니까? 


영화의 액션 장면들도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가끔 화면비율도 바꾸어가며 거대한 아이맥스 화면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액션은 이상할 정도로 심심합니다. 긴장감을 느끼기엔 너무 느리거나 짧으며 리듬이 나쁩니다. 전 제가 라이트제트의 비행전을 이렇게 나른하게 바라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영화는 화면을 채울만한 재료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액션이 아니라 그냥 비싼 자동차와 비행기들입니다. 


시선을 끄는 장면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비주얼은 썩 멋집니다. 제프 브리지스의 일인이역 연기는 재미있습니다. 디지털 특수효과를 빌어 훌쩍 젊어진 브리지스의 CLU는 거의 초현실적인 구경거리입니다. 스토리텔링은 나쁘지만, 원작의 설정을 슬쩍 배반하는 새로운 설정은 이야기와 주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전 플린 부자를 돕는 조력자 프로그램 쿠오라의 캐릭터도 좋았습니다. 제대로 된 각본이라면 이 캐릭터에게 맞는 진짜 스토리를 줄 수 있었을 겁니다.  


[트론]은 나쁘다기보다는 평범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평범함은 지나치게 많은 제작비와 지나치게 좋은 특수효과에 기인한 바가 크죠. 처음부터 이렇게 여유로운 상황에서 느긋하게 만들어질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전 오히려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더 그럴싸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오리지널의 정신에 더 가까우면서도  설정의 가능성을 보다 확실하게 팔 수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10/12/14)



기타등등

1. [트론] 버전 디즈니 로고는 그럴싸합니다. 


2. 영화는 현실 세계를 그릴 때는 2D입니다. 3D가 되는 건 샘이 게임 안으로 들어간 뒤부터죠.


3. [스타 워즈] 팬들이 키들거릴만한 농담이 몇 개 나옵니다. 


감독: Joseph Kosinski, 출연: Jeff Bridges, Garrett Hedlund, Olivia Wilde, Bruce Boxleitner, James Frain, Beau Garrett, Michael Sheen, Anis Cheurfa


IMDb http://www.imdb.com/title/tt110400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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