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호넷 The Green Hornet (2011)

2011.01.22 23:38

DJUNA 조회 수:15278

 

미국 수퍼영웅들은 대부분 만화책 출신이지만, 그린 호넷은 1930년대 라디오극 캐릭터로 탄생했습니다. 라디오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이 캐릭터는 용하게 살아남아 연재 영화, 만화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설로 영역을 넓혀갔지요.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건 6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입니다. 이소룡이 이 시리즈의 카토 역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죠.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말씀드리겠는데, 오리지널 [그린 호넷] 시리즈는 결코 코미디가 아닙니다. 언론재벌이 가면을 쓰고 동양인 조수와 함께 악당들을 때려잡는다는 이야기이니 정말 진지할 수는 없죠. 하지만 적어도 그 설정 안에서 시리즈는 심각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고의로 캠피한 매력을 풍겼던 [배트맨] 시리즈와는 달리 솔직하고 단순했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슬슬 금이 간 건 아무래도 이소룡의 스타성이 당시 타이틀롤을 연기했던 밴 윌리엄스의 스타성을 훨씬 넘어서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변했지요. 30년대만 해도 돈많은 백인남자가 동양인 조수의 도움을 받아 수퍼 영웅일을 하는 건 당연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인종적 편견이 사라지고 이소룡의 스타파워가 더해지자 사람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린 호넷이 잘하는 게 뭐가 있지? 무술도 카토가 잘하고! 운전도 카토가 하고! 도대체 하는 게 없잖아!


세스 로건의 [그린 호넷] 프로젝트도 이런 의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극도로 과장해요. 영화에서 그가 연기하는 그린 호넷/브릿 리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멍청이입니다. 머리 나쁘고 몸도 둔하고 그렇다고 대단한 책임감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얼떨결에 신문사를 물려받은 뒤에도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차수리공인 카토가 천재적인 엔지니어에 무술의 달인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둘이 작당해서 수퍼영웅 팀을 구성하는 겁니다. 물론 중요한 건 카토가 다 합니다. 그가 하는 건 가면을 쓰고 폼 잡는 것밖에 없지요.


이건 척 봐도 패러디입니다. [그린 호넷]의 패러디이기도 하지만 수퍼영웅물 장르 전체의 패러디이기도 하지요. 그냥 패러디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안티질을 하고 있어요. 이 영화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는 캐릭터나 설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면 쓴 자경단 노릇? 바보 짓입니다. 가면 쓴 자경단? 바보입니다. 그들이 맞서는 악당? 그냥 뻔한 조폭입니다. 그 조폭이 어설프게 만화책 악당 흉내를 내려고 한다면? 그 때부터 그는 바보입니다. 그나마 카토는 살아남아야 농담이 유지되지 않겠냐고요? 아뇨. 영화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근거없는 짐작에 불과하지만, 주성치가 이 프로젝트의 주연/감독 자리를 떠났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소룡의 뒤를 잇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이런 각본을 들이밀면 하기가 싫겠죠.


결과는 무정부적인 파괴입니다. 패러디 농담을 망치처럼 휘두르며 원작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때려부수었으니 남는 게 없지요. 캐릭터들은 공감하기 힘들거나 매력이 없거나 쓸모가 없습니다. 배우들 역시 역시 할 일이 많지 않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세스 로건이나 주걸륜은 그래도 영화 내내 바보짓 거리가 떨어지지 않지만, 카메론 디아스나 크리스토퍼 발츠를 보고 있으면 왜 더 좋은 영화를 찾아 떠나지 않고 여기서 이러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허겁지겁 감독직을 물려받은 미셸 공드리는? 글쎄요. 그가 여기에서 무얼 더할 수 있었겠어요. 같이 망치를 들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때려부수는 수밖에.


이런 파괴를 재미있게 볼 수는 있을까요? 물론 있지요. 파괴에는 파괴의 쾌락이 있지요. 그리고 초딩 정신연령의 남자애들이 딱 초딩스러운 짓을 하는 걸 보며 "에라이, 이 덜 떨어진 놈들아!"라고 중얼거리는 걸 의미있는 영화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저 같은 사람들도 조금은 있을 테니까. 전 이게 [찬란한 유산]의 이승기 캐릭터를 매력적인 어떤 것이라고 착각하며 몰입하는 것보다는 건전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 나오는 얼간이들은, 자기네들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무언가라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11/01/22)


★★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 카토는 상하이 출신의 중국인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어차피 카토의 국적은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조금씩 바뀌었으니까요. 잠시 한국인인 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감독: Michel Gondry, 출연: Seth Rogen, Jay Chou, Cameron Diaz, Tom Wilkinson, Christoph Waltz, David Harbour, Edward James Olmos


IMDb http://www.imdb.com/title/tt099040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9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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