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2011)

2011.09.07 09:52

DJUNA 조회 수:20766


1.
[도가니]는 공지영의 2009년작 장편소설이 원작으로, 이 책은 2005년에 폭로되었던 광주인화학교의 성폭력과 학대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지요. 전 아직 원작을 못 읽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뒤로는 더 못 읽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당장은요. 같은 이야기를 다시 따라갈 자신이 없어요.

2.
그냥 화가 나는 이야기입니다. 자애학원이라는 장애인학교에 새로 부임한 인호라는 미술교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이를 인권센터에 알립니다. 하지만 교회 장로에 발이 넓기로 소문이 난 교장을 고발하기는 쉽지가 않죠. 어떻게 방송이 되어서 재판까지 가지만, 이 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뉴스를 보지 않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보기 힘든 영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성폭행 당하는 과정의 꼼꼼한 묘사가 오락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우리 사회와 법이 이들을 제대로 보호할 능력이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영화를 보다가 정말 육체적으로 아프기 시작합니다.

3.
공지영 소설과 영화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일부는 장편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동안 거칠 수밖에 없는 삭제 과정 때문이지만, 일부는 감독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밝게 하려는 의도로 캐릭터와 결말을 수정했기 때문인데, 원작을 읽은 분들에겐 어떻게 느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말하라면, 전 이런 이야기가 결론을 여럿 가지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원작인 소설이 현재진행형인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요. 이 과정을 통해 영화가 조금 평범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4.
실화 소재의 법정물이라는 장르로 봤을 때, 영화는 조금 투박한 편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장르 테크닉의 문제입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영화는 법정이라는 공간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조금씩 서툰 흉내 같아요. 특히 사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규격화된 언어들을 사용해야 할 때는요. 순전히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나오는 대사들도 좀 신경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인권센터 간사라는 사람이 법정에 들어와서야 "전관예우가 뭐예요?"라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 정도면 좀 황당하지 않습니까.

5.
공유의 기존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도가니]는 그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작을 읽고 영화화를 계획한 사람이 공유 자신이라고 하더군요. 생각해 보면 그의 이미지가 이 어두운 영화로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기는 성실하고 좋은 편입니다. 단지 이 영화에서는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적죠. 특히 후반부가 바뀐 뒤로는요. 배우로서는 소설의 결말을 원했을 것 같긴 합니다. 독자들이라면 공유보다 인생의 깊이와 상처가 느껴지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 같기도 하고.

정유미는 공유보다 영화에 보다 편안하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기존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데다가 원래 이 배우의 적응력이 좋죠. 공유가 연기변신을 노리는 인기 배우처럼 보인다면, 정유미는 그냥 인권센터에 일하는 정유미처럼 보입니다. 단지 역시 캐릭터의 평면성과 경직된 대사, 영화의 의무감이 종종 배우를 막습니다.

6.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배우들은 희생자를 연기한 김현수, 백승환, 정인서입니다. 이미지상 캐스팅은 거의 완벽하고 연기에는 고전비극의 묵직함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와, 스타를 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에는 대부분 아이들이 나옵니다. 물론 이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영화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리고 대사가 없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7.
영화의 악역과 연기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올바르게 캐스팅되었고 연기도 프로페셔널하게 합니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그들은 언제나 이류처럼 보입니다. 배우의 탓일까요? 아뇨. 제 생각엔 이들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은 이보다 더 가짜처럼 보였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일급 악당도 아닙니다. 허구 세계에서라면 소모품 역할을 하다 사라질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실제 악당인 거죠. 이들에게 '일류'의 예술적 터치를 제공해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계를 보다 잘 그리는 영화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8.
[도가니]는 고통스러운 영화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상황 때문에 보면서 분노가 터지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적어도 그 분노는 정당한 것입니다. '연예인 싸가지' 같은 것에 열불 터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이 모여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결말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09/07)

★★★

기타등등
1. 정유미 캐릭터는 도대체 왜 공유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계속 혼자 존대를 한답니까? [케 세라 세라] 때도 그러더니! 정말 그런 건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공유 캐릭터는 정유미 캐릭터를 몇 번이나 봤다고 다짜고짜 반말입니까? 너무 어색해서 "넌 지금 뭐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만든 사람들이 이런 걸 당연한 언어습관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거야 말로 이상한 거죠. 당신들은 실제 세계에서도 그럽니까?

2. 법정 장면의 청각장애인 엑스트라들 중 모델이 된 학교에 다녔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감독: 황동혁, 배우: 공유, 정유미, 김현수, 김지영, 정인서, 백승환, 다른 제목: Silenced, The Crucible

IMDbhttp://www.imdb.com/title/tt2070649/
Naver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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