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A Single Man (2009)

2010.07.04 13:51

DJUNA 조회 수:12639



톰 포드의 [싱글맨]은 심각한 영화입니다. 영문과 교수인 주인공 조지는 8개월 전, 16년 동안 같이 살았던 애인 짐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한 동안 집 어딘가에 박아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권총을 꺼내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그는 모든 걸 정리하고 자살을 할 계획인 모양입니다. 영화는 그의 하루를 따라가는 동안 수많은 진지한 주제들을 풀어놓습니다. 사랑과 죽음, 상실의 고통, 나이가 든다는 것, 이 천박한 사회에서 문학이라는 것의 의미, 공포와 정치, 소수자의 권리, 스톤웰 이전의 미국에서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 모두 중요한 이슈죠. 보도자료를 읽어보니, 톰 포드는 1980년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원작 소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입니다. 포드는 아마 영화화를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자기 식으로 소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면 이 이야기에 대한 그의 사랑이 철철 넘쳐흐르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하니, 전 정말로 이 영화를 진지하게 감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게 조금 힘들어요. 이야기의 절실함, 그만큼이나 절실한 콜린 퍼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싱글맨]은 이런 진지함을 여과시키는 괴상한 필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아마 톰 포드의 진짜 직업이 아닐까요? 전 선입견을 접고 이 영화가 패션 디자이너의 첫 장편 영화라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됩니다. [싱글맨]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패셔너블합니다.


네, 패셔너블한 주인공도 진지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패셔너블함 자체가 캐릭터에 반영될 수도 있고요. 누가 뭐란답니까. 하지만 [싱글맨]은 좀 심각합니다. 조지가 사는 1960년대 초반의 캘리포니아는 현실 세계가 아닙니다. 패션 디자이너가 화보를 찍기 위해 재구성한 60년대식 패션의 정수만 모여있는 곳이죠. 이 영화에는 패셔너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매점에서 파는 싸구려 연필깎이에서부터 유령이 신고 있는 반짝거리는 검은 구두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딘가에 명품임을 증명하는 상표를 붙이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디자인된 세상의 진지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감정 자체가 그 디자인의 일부로 박혀버리기 때문이지요.


영화가 제공하는 감각적 쾌락은 이율배반적입니다. 영화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남자의 정신적인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걸 받아들이기엔, 그 남자의 삶은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달콤합니다. 영화 속에 압축되어 그려지는 조지의 인생은 중년 게이 남성의 로맨스에 대한 판타지들이 패키지로 묶인 것 같습니다. 네, 매튜 구드처럼 생긴 남자친구가 죽었다니 안 됐군요. 하지만 남자친구는 회상 속에서 계속 나오니, 우린 그의 상실감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회상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니콜라스 홀트가 연기하는 대학생이 가끔 하늘하늘한 나체를 드러내며 그를 유혹하고, 동네 가게에 술 사러 가면 앞에서 지키고 있던 제임스 딘 짝퉁인 스페인 청년이 그의 차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고, 집에 돌아오면 줄리안 무어가 연기하는 패그해그 여자친구가, 네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그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아냐고 한탄을 늘어놓고 있으니 도대체 빠진 게 뭐가 있답니까. 심지어 잠시 나오는 그의 학교 동료도 리 페이스이며(아, 참으로 일관적인 취향!) 그들이 쿠바 미사일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근육질의 남자들이 상의를 벗고 테니스를 하며 조지에게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단 말이죠.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의심하게 됩니다. 조지는 이미 죽어서 게이 천국에 와 있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전 여전히 [싱글맨]을 추천합니다. 전 톰 포드가, 자신이 이셔우드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관객들에 제대로 전달했다고 믿지 않아요. 하지만 그가 이 영화에 깔아놓은 패셔너블한 자아도취에는 묘한 정직함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영화가 주제의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지나치게 예뻐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진짜입니다. 원래 조지의 삶은 자기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겁고 고통스럽기만 한 게 아니예요. 그런 고통을 커피의 쓴맛처럼 담은 감각적인 경험의 연속이란 말이죠. 그리고 지나치게 예쁜 게 죄인가요. <싱글맨>은 처음부터 카페에 전시된 호사스러운 커피 테이블 북처럼 만들어졌고, 우린 그걸 그런 식으로 즐기면 됩니다. (10/05/17)


★★★


기타등등

줄리안 무어가 은퇴하면 할리우드 남성 게이 감독들은 허전해서 어쩐답니까?


감독: Tom Ford, 출연: Colin Firth, Julianne Moore, Nicholas Hoult, Matthew Goode, Jon Kortajarena, Paulette Lamori, Ryan Simpkins


IMDb http://www.imdb.com/title/tt131598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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