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의 사나이 Man of the West (1958)

2016.09.21 21:21

DJUNA 조회 수:3279


[서부의 사나이]. 참 제목 같지 않은 제목입니다. 너무 넓고 막연해서 제목보다는 장르명 같죠. 이 제목이 먹히지 않는 서부극이 몇 편이나 되겠습니까.

게리 쿠퍼가 연기한 주인공 링크 존스가 등장하는 장면도 무개성적이라는 의미로 참 '서부의 사나이'스럽습니다. 카우보이 옷을 입은 싸나이가 말을 타고 광대한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서부의 평야로 들어오는 거죠. 이 정도면 사전정보 없는 관객들은 아주 정통적인 서부극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이 기대를 깨버립니다. 링크는 오프닝 크레디트가 끝나자마자 타고 온 말을 마굿간에 맡겨놓은 다음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는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탑니다. 이미 철도가 웬만한 곳엔 다 깔려있고 전신시설도 들어와 있는 시대인 거죠. 우리에게 익숙한 서부극의 시공간이 서서히 마지막 장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겁니다. 링크의 목표도 상징적입니다. 그는 지금 마을 사람들이 모은 돈을 갖고 학교 선생님을 구하러 큰 도시로 가는 중입니다.

조금 지나면 영화는 익숙한 서부극 액션 속으로 들어갑니다. 한무리의 무법자들이 링크가 탄 열차를 습격하는 거죠. 하지만 기대했던 화끈한 액션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 한 명 있던 열차의 유능한 보안요원이 그 시시한 악당들을 다 쫓아버리고 열차는 무사히 떠나거든요. 하지만 그 소동 중 링크는 사기꾼 샘 비즐리, 살롱 가수인 빌리 엘리스와 함께 철도에 버려집니다. 머물 곳을 찾아 걸어가던 그들은 낡은 집을 하나 발견합니다.

여기서 링크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물론 관객들은 도입부부터 그의 행동을 보고 짐작했던 것이죠. 링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 전에 열차를 습격한 무법자 일당에 속해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로잡고 십여년 전에 무리를 떠나 다른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거죠. 역시 이 장르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안소니 만의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대보다 훨씬 입체적입니다. 벌어지는 일은 예측 가능하죠. 일당의 두목인 닥 토빈은 링크에게 다시 힘을 합쳐 은행을 털자는 제안을 합니다. 링크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이들의 계획을 막고 인질이 된 두 사람, 특히 옛 동료들이 군침을 흘리며 노리고 있는 빌리를 보호해야 하죠. 하지만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종종 예상을 벗어납니다.

링크는 개과천선한 악당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조금 더 큰 그림을 통해 그를 바라보죠. 그는 '문명화된'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폭력적인 과거에 대해 죄책감을 품고 있고 그건 그냥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속해있던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의심합니다. 야만의 시대는 서부에서도 저물어 갑니다. 이전처럼 법을 무시하며 막 살 수는 없어요. 자신의 야만성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문명화하는 것은 그에게 생존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자신의 야수성을 억누르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토빈의 무리 속에서 그는 테스트를 받습니다. 옛 동료인 콜리와 일대일로 싸우는 장면을 보죠. 그에겐 얼마 전에 성적 모욕을 받았던 빌리의 명예를 지켜주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표면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콜리와 몸싸움을 하는 동안 서서히 이전의 야수성이 고개를 들고 그는 잠시 통제력을 잃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링크가 전율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진짜 클라이맥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링크가 그냥 개과천선한 남자이기만 했다면 이런 장면이 안 나왔겠죠.

이 영화의 메인 악당인 닥 토빈은 다른 의미에서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과거에 갇혀 있고 현재를 보지 못합니다. 비유적으로 리어왕처럼 눈이 멀었습니다. 그는 은행강도를 계획하지만 그가 털려는 마을은 오래 전에 폐허가 되어 있고 은행도 문을 닫은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전 그가 오래 전부터 그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폭처럼 보여요. 토빈이 링크를 그렇게 반겼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죠. 물론 그 자폭은 희생자를 남깁니다. 링크는 은행에 사는 아낙네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빌리가 강간당하는 것도 막지 못합니다.

이 정도면 링크와 토빈이 같은 사람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서부극치고는 실내극의 성향이 강하고 총들고 싸우는 사람들은 모두 한 때 우리 편. 그렇다고 이 영화를 [아이덴티티] 같은 다중인격 스릴러 같은 것으로 보는 건 너무한 일이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빌리에게 진짜로 뭘 봤는지 한 번 물어보죠.) 결국 이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은 링크 존스의 인생을 이룬 다양한 시기를 대변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서부의 사나이]라는 밍밍한 제목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죠?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16/09/21)

★★★★

기타등등
게리 쿠퍼의 마지막 서부극입니다. 링크 역할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참 하고 싶어했다고.


감독: Anthony Mann, 배우: Gary Cooper, Julie London, Lee J. Cobb, Arthur O'Connell, Jack Lord, John Dehner, Royal Dano, Robert J. Wilke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189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9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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