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의 천국 7th Heaven (1927)

2010.03.01 15:08

DJUNA 조회 수:9270

 

(스포일러가 있지만 읽고 보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I'm not used to being happy... it's funny - it hurts!"

 
                                                                -- Diane
 

 

프랭크 보재기의 1927년작인 [제7의 천국]의 원작은 오스틴 스트롱이라는 작가가 쓴 동명 희곡인데,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였으니 당시엔 상당한 히트작이었던 모양이죠. 이 작품은 나중에 헨리 킹이 시몬느 시몽과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으로 리메이크되었지만 첫 번째 영화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해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단순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는 무성영화가 더 잘 어울려요. 무성영화에는 아무리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신비한 힘이 있지 않습니까?

 

영화의 무대는 20세기 초의 파리. 진짜 파리가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상상한 로맨틱한 버전의 파리죠. 앞으로 연인이 될 두 주인공은 모두 파리의 밑바닥 출신입니다. 여자주인공 디안느는 늘 채찍을 가지고 다니는 알코올 중독자 언니에게 학대당하는 가난한 파리 아가씨이고, 남자주인공 치코는 거리청소부로 승진하는 것이 유일한 꿈인 하수도 청소부입니다. 이 둘은 디안느가 언니에게 쫓겨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우연히 만나요. 치코는 디안느를 구해주지만,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디안느가 매춘 혐의로 끌려가는 걸 막기 위해 디안느가 자기 아내라고 거짓말을 해버리죠. 어쩔 수 없이 치코는 경찰이 사실 증명을 위해 방문할 때까지 디안느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합니다.

 

물론 둘은 여기서 사랑에 빠집니다. 그것처럼 당연한 일은 없죠. 하지만 [제7의 천국]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얼핏 보기에 순진멍청한 자칭 마초인 치코와 평생 동네북으로 자라온 디안느는 건질 게 별로 없어보여요. 하지만 이들이 치코가 사는 7층의 꼭대기 방으로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 부분의 트랙킹 숏은 전설이죠) 갑자기 로맨스의 마법이 생겨납니다. 할리우드의 전문가들이 멋대로 뚝딱뚝딱 만들어 놓은 이 가짜 파리의 천국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을 더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게다가 보아하니, 처음엔 별 게 아닌 것 같았던 두 사람들도 보기보다 재미있어요. 자칭 마초인만큼 자칭 무신론자이기도 한 치코가 종교에 대해 내뱉는 순진한 독설들은 귀여워요. 그런 그가 얼떨결에 디안느에게 훌렁훌렁 넘어가며 자신의 그 얄팍한 외피를 던져 버리는 과정도 사랑스럽고요. 새로 맺은 가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서서히 이전의 비루함을 벗어던지고 자긍심을 찾아가는 디안느의 이야기도 보고 있으면 미소를 잔뜩 머금고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게다가 자넷 게이너와 찰스 파렐은 어쩜 그렇게 궁합이 잘 맞는지요. 그 뒤로 그들이 11편이나 되는 영화에 커플로 출연한 게 이해가 됩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평탄하게 이어지면 재미가 없겠죠. 당연히 장애가 있습니다. 바로 치코가 디안느에게 정식 청혼을 하려는 그 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겁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끔찍한 우연의 일치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전쟁의 흥분과 공포가 이들의 로맨스에 오히려 불을 당기는 것이죠. 무성영화지만 이 부분은 거의 오페라입니다. 끊임없이 조금씩 뒤로 미루어지는 이별 속에서 두 사람의 폭풍 같은 감정은 거의 폭발할 지경입니다. 그들 뒤에서 배경이 되어주는 전쟁 전야의 파리 풍경은 그들에게 오케스트라 반주가 되어주고요. 마침내 이 장면이 끝나면 관객들은 푸치니의 걸작 아리아를 서너 편 연달아 들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묘사는 예상 외로 모던합니다. 영화는 이를 단순한 감상적인 비극이나 애국심 표출의 장으로 묘사하지 않아요. [제7의 천국]이 그리는 전쟁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살생무기들을 통해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희비극의 장입니다. 이 부분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치코와 디안느의 친구인 늙은 택시운전사가 갑작스럽게 군대에게 징발당한 낡은 택시를 끌고 전쟁터로 뛰어드는 장면이겠지요.

 

그러는 동안에도 로맨스는 계속 진행됩니다. 치코와 디안느는 매일 아침 11시 정각이면 서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텔레파시로 대화를 합니다. 이들에게 갑자기 초능력이 생겼냐고요? 그런 거 묻지 마세요. 그들은 그냥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는 동안 치코의 무신론도 조금씩 깨져갑니다. 그러기엔 그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로맨스가 너무나도 신성하고 신비스러워 보이기 때문이죠. 아마 현대 관객들에게 종교에 대한 이런 감상적인 접근법은 유치해보일 겁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치코의 개심은 이해가 됩니다. 적어도 [제7의 천국]의 세계에는 신이 존재합니다. 단지 그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로맨스의 신이며, 잔인한 운명 뒤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윙크를 날리는 괴상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입니다.

 

결국 전쟁은 끝납니다. 돌아온 친구들이 치코의 전사를 알리지만 사실 치코는 살아있었죠. 부상으로 실명했지만 전쟁 첫 날 마지막으로 본 디안느의 얼굴을 머릿속에 가득 담고 있는 그는 필사적으로 아내의 이름을 외치며 그 긴 계단을 걸어올라갑니다. 이 장면을 예고하는 어떠한 복선도 앞에 나오지 않았으니, 여러분은 이게 말이 되냐고 외치고 싶겠죠. 하지만 결국 여러분은 외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타협의 흔적이 역력한 [선라이즈]의 결말과는 달리, [제7의 천국]의 해피엔딩은 영화의 내용과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에서 다른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10/03/01)

 

★★★★

 

기타등등

자넷 게이너는 이 영화와 [선라이즈], [거리의 천사]에서 보여준 연기로 제1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로 규칙이 개정되어서 한꺼번에 여러 편의 영화로 상을 받는 일은 없어졌죠.

 

감독: Frank Borzage 출연: Janet Gaynor, Charles Farrell, Ben Bard, Albert Gran, David Butler, Marie Mosquini

 

IMDb http://www.imdb.com/title/tt001837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3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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