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2010)

2010.05.14 19:58

DJUNA 조회 수:16584


우리에게 또 하나의 [하녀] 리메이크가 필요한가? 글쎄요. 전 이전에도 지나치게 많았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전 김기영이 [하녀] 리메이크에 대한 집착을 일찍 접었다면 그의 필모그래피가 훨씬 풍요로워졌을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하지만 임상수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었겠죠. 김기영이 마지막으로 [하녀] 리메이크를 만들었을 때와 지금은 또 세상이 다르니까요.


임상수는 극단적인 부유층들이 늘어나고 중산층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빈곤층으로 떨어진 지금의 상황을 무대로 잡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하녀 은이는 보통 때 같으면 중산층 가정의 가정주부 노릇을 하고 있었을 사람이에요. 말을 들어보니 대학도 조금 다녔고 평택에 작은 아파트도 하나 있다고요.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이고 그럭저럭 감정이입도 가능합니다. 은이는 현실세계의 인물이에요. 적어도 영화 초반에는.


하지만 은이가 들어간 집의 사람들은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이들은 극단적인 부유층을 극도로 과장한 캐리커처들이거든요. 이들의 말과 행동 중 자연스러운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거의 [장화, 홍련]에 맞먹을 정도로 현실이 제거된 추상적 세트 안에서 서구 부자들의 흉내를 내고 있지요. 그 흉내가 끝나면 본성이 돌아오는데, 그 본성도 일일연속극 또는 궁중사극 캐릭터들의 흉내입니다. 이들에게는 본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어색한 흉내인데, 자기네들은 그걸 모르는 거죠.


임상수의 [하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웃음과 야유의 연속입니다. 영화는 이 영화에 나오는 '상류사회' 사람들을 진심으로 경멸해요. 이들은 자신의 계급 환경에 완벽하게 사로잡혀 인간처럼 굴 능력을 상실한 잔인한 바보들입니다. 은이와 선배 하녀 병식은 조금 나은 대접을 받지만 그렇다고 과연 우리가 그 캐릭터에 푹 몸을 담글 정도인지? 아뇨. 그 정도는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부드러운 구석이 없어요. 하긴 그들이 자발적인 '하인' 코스프레를 선택한 이상 그들도 그렇게 나은 대접을 받을 가치는 없지요.


프로그램을 보니 영화의 서스펜스에 대해 길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던데, 이 영화에는 서스펜스는 없습니다. 서스펜스가 가능하려면 관객이 자발적으로 걱정해줄만한 인물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죠. 하지만 임상수의 영화에는 그런 게 전혀 없거든요. 이들이 몽땅 폭탄에 맞아 죽건 성병에 걸려 너덜너덜해지건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단 말입니다.


김기영의 영화들과 비교하면 더 심심해집니다. 굉장히 활동적이었던 원작의 하녀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하녀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뭔가 하겠다고 결심하는 건 영화가 끝나기 십여 분 전이죠. 그리 지루한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도 없이 시계를 봤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답답하죠. 뭔가 국면전환이 일어나야 될 텐데 여전히 현재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걸요. 하긴 임상수는 김기영식 클라이맥스를 허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의 이죽거림이 손상을 입지요. 이런 이죽거림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야 하는 겁니다.  


영화의 세트는 호사스럽습니다. 일단 거대하고 진품 예술품도 많이 걸었죠. 주인장은 피아노로 베토벤을 연주하는 게 취미고 시간이 나면 이탈리아 오페라를 듣습니다. 하지만 세련된 느낌은 들지 않아요. 이들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이 아니거든요. 이런 것들은 호사스러울수록 촌스러워 보이죠. 하긴 그게 임상수의 의도일 수도 있을 겁니다. 서구문화에 어설프게 집착하는 김기영 영화 속 캐릭터들을 생각해보면 나름 일관성도 느껴지는군요. 김기영은 이렇게 극단으로 나간 적이 없지만요.


배우들은 좋은 편입니다.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잘 캐스팅되었어요. 전도연의 현실적인 섹스 어필, 윤여정의 세월에 닳디닳은 속물주의, 이정재의 번지르르한 공허함, 서우의 신경질적인 어린애와 같은 투정이 캐릭터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죠. 쓰고 나니 별로 좋은 말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칭찬입니다. 어차피 이들은 입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아닌 걸요. 배우의 기존 이미지만 확실하게 활용해도 성공한 거죠.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처럼 관객들을 흥분하게 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영화는 오로지 머리로만 만들어졌고 계획에 어긋나는 즉흥성과 일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고로 김기영의 원작과 일대일로 비교하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임상수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자연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딱 그 사람이 김기영의 소스를 가지고 만들 법한 영화가 나왔어요. (10/05/04)


★★★


기타등등

문소리와 김진아의 카메오가 있습니다. 


감독: 임상수 출연: 전도연, 윤여정, 서우, 이정재, 박지영, 황정민, 안서현 다른 제목: The House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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