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는 해머 호러의 쇠퇴기였습니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기존 주인공들의 약발은 떨어져갔고, 10여년 동안 염치 없이 반복되었던 스토리와 공식은 식상해졌습니다. 하지만 해머 호러의 종말은 보기만큼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숨이 끊어질 때까지 누워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들의 죽음은 발악에 가까웠습니다. 섹스와 폭력은 갈수록 노골적이 되었고, 금기는 깨어졌으며, 엉뚱한 실험들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은근히 재미있는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고요. 전성기였다면 반 헬싱 박사와 드라큘라를 홍콩 쿵후 영화 속에 집어 던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어벤저] 시리즈의 브라이언 클레멘스가 감독한 [캡틴 크로노스 - 뱀파이어 헌터]도 그런 발악 중에 나온 작품입니다. 결과를 미리 이야기한다면 그 발악은 실패였습니다. 원래 시리즈로 계획되었던 작품이었지만 워낙 흥행 성적이 나빠서 이 한 편으로 끝나버렸죠. 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연 배우 호르스트 얀손에겐 크리스토퍼 리나 피터 쿠싱의 카리스마는 없습니다. 그냥 흐릿한 금발 미남에 불과하죠. 그리고 아무리 새로 꾸민다고 해도 뱀파이어 사냥 이야기는 슬슬 물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해머 영화가 역사의 일부가 되었고, 관객들이 더 이상 연대기 순으로 작품을 경험할 필요가 없는 지금 와서 보면, [캡틴 크로노스]는 그렇게 지루한 작품이 아닙니다. 여전히 뻔한 뱀파이어 사냥 공식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자기만의 재미도 많은 영화죠. 세월이 지나면서 단점들은 의미를 잃었고 장점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컬트팬들도 생겨났고요.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캡틴 크로노스입니다. 해머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이름 없는 중부유럽 국가의 전직 장교인 그는 곱사등이 동료 그로스트 교수와 함께 팀을 이루어 뱀파이어들을 사냥합니다. 반 헬싱 교수와는 달리 그들은 철저하게 분업을 고수합니다. 그로스트 교수가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지식을 제공하고, 캡틴 크로노스는 그를 이용해 뱀파이어들을 죽이죠. 그들이 어떻게 생계를 꾸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들의 고용주가 나오지 않아요.


이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이전 해머 호러 뱀파이어들과는 종류가 다릅니다. 일단 대낮에도 뻔뻔스럽게 돌아다니죠. 희생자들은 죽거나 뱀파이어가 되는 대신 생명력을 빼앗겨 급속도로 늙어버리고요. 그로스트 교수는 영화 중간에 세상엔 온갖 종류의 뱀파이어들이 있고 죽이는 방법도 다양하다고 주장하는데, 아마 시리즈가 계속 되었다면 우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양한 뱀파이어 변종들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뱀파이어만큼이나 영화의 스토리 역시 전통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캡틴 크로노스]는 지금까지 나온 해머 영화들 중 가장 잡탕입니다. 일단 캡틴 크로노스는 전통 활극 주인공입니다. 칼을 휘두르며 액션을 하는 게 직업이죠. 이런 사람이 뱀파이어 사냥을 하겠다고 해머 호러 장르에 뛰어든 겁니다. 영화에서 그와 그로스트는 "누가 뱀파이어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치게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반전이 있는 추리물이고요. 이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중간중간에 다른 장르들도 조금씩 들어가 있어요. 특히 캡틴 크로노스가 술집에서 동네 건달들과 상대하는 에피소드는 딱 서부극 스타일이 아닙니까? 


장르 혼합만으로 재미있는 영화가 나온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캡틴 크로노스]는 이 기회를 썩 잘 살리는 편입니다. 스토리는 날렵하고, 액션은 그럴싸하며, 유머는 엉뚱합니다. 전 특히 크로노스의 친구 마커스 박사와 관련된 중반 에피소드의 뻔뻔스러움이 좋았답니다. 철저하게 심각한 상황이고,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심각한 프로답게 대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지요. 시리즈에 제대로 된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런 재료들이 어떤 결과를 맺었을지 궁금해집니다. (10/11/27)



기타등등

시리즈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자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블레이드] 시리즈만 해도 수상쩍을 정도로 설정이 비슷하니까요.


감독: Brian Clemens, 출연: Horst Janson, John Carson, Shane Briant, Caroline Munro, John Cater, Lois Daine, Ian Hendry, Wanda Ventham


IMDb http://www.imdb.com/title/tt007127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3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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