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 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영어로 [The Secret in Their Eye]라고 번역되는 제목을 [비밀의 눈동자]라고 옮겼을 때부터 성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보니 역시 내용과 전혀 맞지 않아요.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개봉 직전 제목 앞에 '엘 시크레토'라는 걸 덧붙였는데, 이건 거의 무의미한 절반짜리 동의어이고 심지어 표기법도 안 맞잖습니까.

2.
[비밀의 눈동자]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하얀 리본]과 [예언자]를 누르고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끔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패왕별희]를 [아름다운 시절]이 눌렀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앞의 두 편을 누를 만한 작품일까요. 셋은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이고 [비밀의 눈동자]도 자기만의 재미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영화에 [하얀 리본]이나 [예언자]를 누를만한 무게가 있다고 느끼지는 못합니다. 남이 준 상에 대해 왈가왈부를 하는 건 무의미한 일입니다만.

3.
영화의 도입부는 제임스 엘로이의 추리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1974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름다운 교사가 무참하게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하는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검찰청의 벤하민 에스포지토와 이레네 메르난데스 헤이스팅스의 활약으로 범인은 검거되지만 아르헨티나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 속에서 법에 의한 인과응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죠. 1999년, 은퇴한 벤하민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로 결정하고 과거를 돌이켜봅니다.

엘로이의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밀의 눈동자]가 훨씬 멜로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 참혹한 사건을 로맨스의 렌즈를 통해 바라봅니다. 벤하민에게는 종결되지 못한 살인사건만큼이나 자신과 이레네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도 중요하며 그는 둘의 결말 역시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는 교사의 남편 역시 사랑이라는 동기에 의해 묶여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글로 써놓으면 이치에 맞는 것 같은데, 정작 전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로맨스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벤하민과 이레네의 이야기는 그냥 평범한 오피스 로맨스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일들을 누를만한 비극적 존재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주인공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인상만 주지요. 덕택에 역사와 범죄에 할애할 수 있었던 시간도 많이 날아가버렸고요. 둘이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깊이 다루거나 적절한 수준으로 축소시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단 말이죠.

4.
[비밀의 눈동자]를 보면서 전 이 작품이 와이드스크린으로 찍은 텔레노벨라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텔레노벨라 장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장르의 성격이 보인다는 거죠.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투박하다고 할 법한 그런 터치는 대사나 캐릭터, 멜로드라마를 다루는 방법에서 계속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 작가들이라면, 영화가 중요한 재료로 삼고 있는 a가 고장난 타이프 라이터 같은 노골적인 재료는 민망해서라도 쓰지 않았겠죠.

감독인 후안 호세 캄파넬라가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극처럼 찍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핸드 헬드 롱테이크 테크닉의 끝을 보여주는 중반의 범인 검거 장면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예외적인 장면은 비교적 담담한 다른 장면들에 비해 기교가 너무 튀어 어색해보입니다. 일부러 "나는 영화야!"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달까요.

여전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관심을 끄는 드라마와 캐릭터도 많아요. 하지만 전 이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긴 러닝타임과 관습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존재가 필수적이죠. 이 작품이 텔레노벨라였다면 지금은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는 벤하민과 이레네의 관계도 역시 충분히 살아났을 거고 25년이라는 시간과 역사와 정치 역시 자기 무게를 찾지 않았을까요.

5.
마지막 결말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음, 전 예측을 했습니다. 이야기의 주체인 캐릭터가 스스로 동기와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데 어떻게 놓칠 수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몇 년 째 굴리고 있었다는 거죠. 영화 나오기 전에 써먹는 건데. 하지만 에두아르도 산체리의 원작 소설은 한참 전에 나왔을 테니, 뒷북인 건 마찬가지였겠죠. 그래도 아직 버리지는 않으렵니다. 설마 이 소재를 그 사람들만 썼겠어요. (10/10/27)

★★★

기타등등
디지털 상영이었는데, 사운드와 화면의 싱크가 맞지 않더군요. 사운드가 몇 분의 몇 초 정도 화면보다 빨랐어요. 나중에 시사회가 한 번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반 상영 때도 이러면 곤란하겠죠.


감독: Juan José Campanella, 출연: Soledad Villamil, Ricardo Darín, Carla Quevedo, Pablo Rago, Javier Godino, Bárbara Palladino, 다른 제목: The Secret in Their Eye

IMDb http://www.imdb.com/title/tt130580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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