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시리즈로 유명한 케네스 클락 경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큰 아들은 보수당 정치가이자 역사학자, 일기작가로 유명한 앨런 클락이죠. 그보다 한참 덜 유명한 작은 아들 콜린 클락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활동했는데, 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요. 하여간 형처럼 꾸준히 일기를 썼던 콜린 클락은 23살 때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 [왕자와 무희]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당시의 일기를 정리해서 [왕자, 무희와 나]와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죠. 여기서 콜린 클락은 [왕자와 무희] 촬영 기간 중 그가 마릴린 먼로와 친근한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당연히 영화는 마릴린 먼로가 [왕자와 무희]를 찍기 위해 영국을 찾았던 몇 주 간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몰라도 짐작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마릴린 먼로는 지각을 밥 먹듯 하고 자신감 부족에 약물 중독과 스트레스로 행동은 들쑥날쑥.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런 먼로의 태도에 폭발하기 직전. 물론 제목이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니, 주인공인 콜린 클락이 마릴린 먼로와 사랑에 빠지고 둘이 잠시 함께한 시간들도 그려집니다.

대단한 드라마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콜린 클락에게 그 시기가 소중했다고 해도 그는 로맨스의 남자주인공이 되기엔 약하죠. 마릴린 먼로에게는 더 큰 드라마가 있었고, 주변에는 로렌스 올리비에, 아서 밀러, 비비안 리, 시빌 손다이크와 같은 거물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개성이나 존재감을 과시할 여유가 없어요. 그는 어떻게 봐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대중의 팬심을 대표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스토리보다는 마릴린 먼로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짧은 에피소드일 뿐이고요.

결국 이 영화는 주연배우가 마릴린 먼로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미셸 윌리엄스는 언뜻 보면 그럴싸해요. 섹시하다기보다는 순진무구하고 결백해보이는 풍성한 금발이죠. 하지만 일단 마릴린 먼로를 본격적으로 모방하기 시작하면 위험한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먼로처럼 아이콘화한 인물은 연기하는 건 위험한 일이죠. 어떻게 해도 모자란다는 소리를 들을 테니까요. 그리고 초반에 관객들은 원본과 배우 사이의 간격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 간격은 오히려 영화에 장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미셸 윌리엄스가 마릴린 먼로를 흉내내려는 과정의 위태로운 서스펜스가, 마릴린 먼로가 자신감 바닥인 상태에서 영국 배우들과 일하고,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자신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맞추는 과정의 스트레스와 자연스럽게 일치하기 때문이죠. 마릴린 먼로가 되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투쟁을 벌이는 건 윌리엄스나 먼로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미셸 윌리엄스의 몸과 정신을 통해 재구성된 마릴린 먼로는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으로 묶인 수많은 요소들의 종합판입니다. 콜린 클락의 책에서도 자료를 뽑아왔겠지만, 우리가 아는 다른 일화들이나 사진, 영화 기타 등등에서도 조금씩 재료를 가져왔어요. 어떤 것은 허구이고, 어떤 것은 실화이며, 어떤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꿈의 일부입니다. 이것들이 콜린 클락이 가이드라인처럼 제시한 단순한 이야기를 따라 일종의 푸가처럼 흘러나오는 거죠. 그리고 마릴린 먼로와 미셸 윌리엄스의 두 배우가 이중나선을 그리며 만들어내는 최종결과물은 아슬아슬하게 아름답습니다. 장점과 단점 모두가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이어서 보는 동안 거의 아프기까지해요.

로렌스 올리비에를 연기하는 케네스 브래나는 조금 다른 식으로 재미있습니다. 그나마 흉내라도 내려 했던 윌리엄스와는 달리 브래나는 올리비에와 조금도 닮지 않았죠. 연기 스타일도 전혀 다르고. 하지만 올리비에와 브래나 사이에는 셰익스피어와 기타 레파토리의 공통분모가 있고 이 때문에 브래나의 연기는 올리비에라는 인물의 모사라기보다는 올리비에와 브래나라는 두 배우의 대결처럼 보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요. 전 모릅니다. 콜린 클락이 일기에 기록한 모든 일들이 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팬심에 스스로 넘어간 젊은이의 판타지였을 수도 있죠.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와서 그걸 구별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어차피 영화는 우리가 아는 먼로의 캐릭터를 깰 수 있는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는 걸요. (12/02/21) 

★★★

기타등등
1. 영화를 보는 동안 제가 가장 끌렸던 인물은 주디 덴치가 연기했던 시빌 손다이크였습니다. 손다이크가 정말 영화가 그린 인물과 같았다면 주변 사람들은  자기 능력의 200퍼센트는 냈을 것 같습니다. 진짜 완벽한 '선배'예요. 정작 선배질은 전혀 안 하는. 

2. 영화는 소위 매소드 액팅에 대한 영국인들의 야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긴 저도 매소드 액팅이 마릴린 먼로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트라스버그 이전과 이후의 마릴린이 정말 많이 다른가요?

감독: Simon Curtis, 출연: Michelle Williams, Eddie Redmayne, Kenneth Branagh, Julia Ormond, Judi Dench, Emma Watson, Dougray Scott, Toby Jones, Philip Jackson, Dominic Cooper, Derek Jacobi, Zoë Wanamaker

IMDb http://www.imdb.com/title/tt165542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8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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