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은 영국 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함께 범인 트릭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레이몬드 챈들러는 트릭의 인위성을 비난했지만, 그게 과연 탓할 일인가 싶습니다. 어차피 크리스티가 이 소설에서 그리는 세계는 체커 보드처럼 추상적인 곳이며, 그 세계의 사람들도 그 곳의 독특한 논리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이니까요. 

1974년에 나온 시드니 루멧의 영화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무대는 물론 원작과 마찬가지로 오리엔트 특급 열차 안입니다. 눈사태로 고립된 열차 안에서 라쳇이라는 남자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고, 마침 그 열차에 타고 있던 프와로는 열차 회사 간부의 의뢰를 받아 사건을 수사합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열차칸 안은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온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모두 철통 같은 알리바이가 있지요. 그래도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프와로는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그 진상은 그냥 환상적입니다.

영화는 복수극입니다. 라쳇은 알고 봤더니 암스트롱 유괴사건(린드버그 유괴사건이 모델이라고 합니다)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최종 지휘한 잔인한 범죄자였죠. 때문에 이 살인사건 자체가 정의의 심판이고, 진범을 찾는 프와로의 수사는 뒤처리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초반의 어둠을 걷어내면 영화는 거의 코미디입니다. 원작보다 훨씬 밝아요. 원작이 그래도 비현실적인 장르 규칙 안에서 진지하다면 영화는 유쾌한 왈츠인 리처드 로드니 베넷의 영화음악처럼, 이야기의 비현실성을 가볍게 가지고 노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끔찍한 범죄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지만요.

영화는 일종의 레뷔 공연과 비슷합니다. 앨버트 피니가 연기하는 에르퀼 프와로 앞에, 로렌 바콜, 잉그리드 버그만, 숀 코너리, 재클린 비셋,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존 길거드, 웬디 힐러, 안소니 퍼킨스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불려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5분에서 10분까지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할 공간을 받아요. 하나의 연기가 끝나면 다음 연기가 따라오고... 이런 식으로 용의자 역 배우들이 모두 자기 파트를 끝내면 프와로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사건 진상을 설명합니다. 당연히 게스트 배우들의 질과 능력이 중요한데, 이 정도 캐스팅이면 불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시드니 루멧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은 크리스티의 소설을 각색한 최초의 영화도 아니고, 에르퀼 프와로가 등장하는 최초의 영화도 아닙니다. 하지만 올스타 캐스트로 장식된 번지르르한 크리스티 각색물 유행의 본격적인 시작이긴 하죠. 물론 이 유행은 곧 시들해졌고, 영화를 떠난 크리스티 각색물들은 텔레비전의 세계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 이게 이치에 맞는 거 같아요. 적어도 크리스티의 정통 추리물은 영화 장르에서는 어색합니다. 아무리 스타들을 총동원해도 액션 대부분이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텔레비전에서는 이를 영화보다 더 쉽게 커버하는 것 같습니다. (13/01/20)

★★★

기타등등
앨버트 피니의 프와로는 재미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크리스티 각색물들을 챙겨봤던 팬들은 그 자리에 당연히 데이빗 슈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죠. 몇 년 전 슈세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 나오긴 했습니다. 근데 그 각색은 루멧의 영화보다 조금 더 자유분방합니다. 주변의 크리스티 팬들은 별로 안 좋아하더군요.

감독: Sidney Lumet, 배우: Albert Finney, Lauren Bacall, Martin Balsam, Ingrid Bergman, Jacqueline Bisset, Jean-Pierre Cassel, Sean Connery, John Gielgud, Wendy Hiller, Anthony Perkins, Vanessa Redgrave, Rachel Roberts, Richard Widmark, Michael York, Colin Blakely, George Coulouris, Denis Quilley

IMDb http://www.imdb.com/title/tt007187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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