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론 TRON (1982)

2019.07.29 23:49

DJUNA 조회 수:5446


지금 디즈니는 미국 영화 산업계의 고질라지만 1980년대 초만 해도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애니메이션과 좀 이상한 실사영화를 만드는 한물 간 회사였어요. 물론 전 당시 나온 디즈니 영화들을 좋아했습니다만 그건 본론과 상관 없는 이야기이고.

스티븐 리스버거의 [트론]도 당시에 나온 영화입니다. 전 이 영화를 디즈니 실사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접했는데, 솔직히 내용이 이해가 안 갔어요. 나중에 주말 오후 시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영화 전체를 보았는데, 보는 내내 어리둥절했습니다. 요새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면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요. 며칠 전까지 넷플릭스에 걸려 있었으니 본 사람들이 꽤 있었을 수도 있는데.

왜 그랬을까? 내용이 어려워서? 그건 아니에요. [트론]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합니다. 단지 소재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80년대 초에나 먹히는 것이었어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천재 프로그래머인 플린은 거대 컴퓨터 회사 엔콤의 부사장 딜린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 수상쩍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의심하는 엔콤의 프로그래머 앨런과 엔지니어 로라는 플린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엔콤 회사에 잠입한 플린은 그만 회사의 가상현실 속에 빨려들어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프로그래머와 똑같이 생긴 수많은 프로그램이 마스터 콘트롤 프로그램의 독재에 신음하며 강제로 죽음의 경기에 내몰리고 있었어요. 그들은 종교를 믿는데 자기 세상 바깥에 유저라는 신적인 존재들이 있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거죠.

어디가 이상한지 아시겠죠. [트론]의 배경은 그냥 80년대 초의 현대입니다. 당연히 의미있는 가상현실 같은 건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 속에 나오는 가상현실은 실제 가상현실이 아니라 [반지의 제왕]의 가운데땅처럼 일종의 판타지 공간입니다. 이 영화 속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의인화된 존재고요. 플린이 로라의 레이저 기기에 분해되어 가상현실로 들어가는 과정은 좀 SF 같지만 따지고 보면 판타지도 이런 판타지가 없는 거죠. 지금은 당연히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기술이 더 그럴싸한 SF 상상력을 지원하니까요. 오직 80년대 초에 딱 한 번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어요.

[트론]에서 내용보다 중요한 건 기술이죠. 컴퓨터 그래픽을 본격적으로 쓴 메이저 영화니까요. 물론 이 영화에 사용된 기술은 지금 보면 아주 조촐한 것이었어요. 요새 같으면 그냥 PC로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심지어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이게 만든 장치 상당수는 그냥 아날로그였고요. 하지만 당시엔 엄청나게 혁명적인 시도였고 이 시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현란한 서커스가 가능했던 것이죠. 그리고 의외로 지금 봐도 그림이 괜찮아요. [라스트 스타파이터]의 컴퓨터 그래픽 보면 요새는 애들 장난 같잖아요. 하지만 [트론]은 더 단순한 기술을 쓰면서도 그 결과물을 그럴싸한 영화적 스펙터클로 전환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게 속편인 [트론 레가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거고요. (19/07/29)

★★★

기타등등
넷플릭스에서 내린다고 해서 내리기 몇 시간 전에 허겁지겁 보았어요.


감독: Steven Lisberger, Bruce Boxleitner, David Warner, Cindy Morgan, Barnard Hughes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84827/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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