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리 앙트와네트 이야기입니다. 몇 백년 동안 정말 온갖 매체를 통해 반복되었던 소재죠. 하지만 샹탈 토마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브느와 자코의 [페어웰, 마이 퀸]은 용하게 이 이야기를 다룰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바스티유 감옥 함락 전후의 며칠 동안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그리는데, 그 이야기를 시도니 라보르드라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책 읽어주는 시녀의 관점으로 제한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익숙했던 이야기가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됩니다. 베르사유 버전 [위층, 아래층]이 되는 것이죠. 이제 베르사유 궁은 마리 앙트와네트를 주인공으로 한 희비극의 무대가 아닙니다. 위에는 왕과 왕비가 있고 맨 밑에는 하인계급이 있는 하나의 세계지요. 영화는 궁 지하에 있는 지저분한 고용인들의 영역에서부터 왕비의 침실까지 분주히 누비면서 이 세계의 구조를 탐사합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종말론적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전우주처럼 생각하던 이 작은 우주는 멸망을 앞두고 있고 몇몇 예민한 사람들은 이미 그 징조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놀려대는 건 무의미한 일입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알고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영화는 베르사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대신 그들을 시대와 계급의 한계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사람들로 보고 그 상황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꼼꼼하게 연구합니다. 그런 면에서 활동범위가 넓은 시도니 라보르드는 상당히 좋은 안내자입니다. 궁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누구라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시도니는 이 영화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과 관객이죠. 극과 극을 달리는 이 두 가지 역할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시도니가 주인공인 드라마입니다. 시도니는 요새 아이돌 팬들이 그러는 것처럼 마리 앙트와네트를 열렬히 사랑해요. 사랑하는 왕비님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합니다. 왕비가 자신의 그런 헌신을 알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심지어 일부러 감추기도 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큽니다. 여성판 [시라노]를 생각해보세요. 여러 면에서 아귀가 맞습니다.

그러나 헌신의 대상인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시도니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왕비는 시도니에게 친절하지만 그 사람은 아마 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을 거예요. 그녀는 시도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무시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베르사유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리 앙트와네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폴리냑 공작부인입니다. 시도니는 드라마를 엿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 기껏해야 그 이야기 속에서 기능적 역할을 하는 단역에 불과해요.

시도니의 관점과 마리 앙트와네트의 관점이 만나는 순간 이 드라마는 작은 비극의 정점을 찍습니다.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의 정점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무게 중심은 더 상처받고 더 하찮은 시도니에게 기울긴 하지만요.

호사스러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극의 화려함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죽은 쥐가 물에 떠다니고 모기에 물린 살갖이 드러나는 등 지저분한 장면들이 더 많죠. 왕비의 침실도 솔직히 그리 청결해보이지는 않아요. 날아다니는 분가루 속에 온갖 병균들이 섞여있을 거 같죠. 하지만 마리 앙트와네트를 다룬 일반 사극과는 달리 이 꾸미지 않은 시각정보들은 조금 다른 종류의 풍성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로케이션의 힘이겠지만요.

레아 세두의 캐스팅은 절묘합니다. 이 사람은 충분히 예쁘면서도 왕비와 폴리냑 공작부인을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기가 죽은 모습을 보여도 그게 또 당연해보이거든요. 그게 이 사람이 가진 비전형적인 매력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마리 앙트와네트를 연기한 다이안 크루거는 나이로 보나, 국적으로 보나, 최근 몇 년 동안 마리 앙트와네트를 연기한 사람들 중 가장 제대로 캐스팅된 배우죠. 물론 크루거가 더 미인이겠지만. (13/12/01)

★★★

기타등등
위키에서 확인해 보니 왕비와 폴리냑 공작부인의 관계는 영화로 각색되면서 추가되었다고 하더군요. 소설에서는 결말이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크게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감독: Benoît Jacquot, 배우: Léa Seydoux, Diane Kruger, Virginie Ledoyen, Noémie Lvovsky, Xavier Beauvois, Michel Robin, Julie-Marie Parmentier, Lolita Chammah, Marthe Caufman, 다른 제목: Farewell My Queen

IMDb http://www.imdb.com/title/tt1753813/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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