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밀 이레쉬의 [발레리에의 이상한 일주일]은 1932년에 나온 비체슬라프 네즈발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네즈발의 소설은 체코어권에서는 고전이라는데 해외에서는 대부분 이레쉬가 만든 영화의 원작으로만 알려지고 있고 영어 번역도 최근에 나왔습니다. 영화를 보면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긴 합니다. 과연 영화만큼 난장판인지 궁금하거든요.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발레리에라는 소녀가 주인공이고요. 이 소녀가 일주일(이겠죠? 제목이 그렇다고 하니까) 동안 겪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일들은 사실일 수도 있고 소녀의 백일몽일 수도 있는데, 그 안에 뱀파이어, 마녀, 근친상간, 동성애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여러 모로 비슷하지만 그 재료 대부분이 19세기 고딕 소설들에서 나왔고 훨씬 정리가 안 되어 있어요. [앨리스]는 그래도 자체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돌아가지만 [발레리에]는 그냥 뜬금없습니다.

영화의 비주얼은 익숙합니다. 이 시기에 동유럽 국가에서 많이 나왔던 동화 원작 어린이 영화와 비슷해요. 중세시절 건물들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몽환적이고 나른한 화면 같은 것 말이죠. 이 영화의 고유의 개성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그런 전통의 답습일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진짜 동화 원작 어린이 영화와는 달리 영화가 많이 음란합니다. 아주 자극적인 노출이나 폭력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13살 소녀의 성적 성숙을 다룬 판타지는 다 어느 정도 음란할 수밖에 없죠. 단지 이게 안젤라 카터(실제로 이 작품은 카터의 소설이나 카터 원작의 닐 조던 영화 [늑대의 혈족]과 많이 비교됩니다)처럼 주체적으로 주인공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냐, 아니면 남성 예술가의 관음증적인 판타지냐라는 질문이 남는데, 카터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추는 어느 정도 후자로 기울 수밖에 없어요. 하여간 지금은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는 게 많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처럼 13살 소녀에게 주연을 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답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 위의 질문과는 별도로, [발레리에의 이상한 일주일]이 익숙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아주 특이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많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이 그런 것처럼 이 영화의 초현실성은 종종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그런 재료들을 조립하는 슬쩍 빗나간 편집 덕택에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실제 꿈에 가까운 퀄리티를 부여 받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정체 불명의 더빙판 외국 영화를 보며 나른한 백일몽에 빠졌던 어린 시절 주말 오후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그 때 그대로의 경험은 아니죠. 정말 텔레비전에서 이런 영화를 틀어주었을 리는 없으니까요. (15/04/16)

★★★☆

기타등등
전 이 영화를 2004년에 나온 붙박이 자막이 달린 비디오 화질의 DVD로 갖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여름에 크라이테리언에서 블루레이가 나온다고 합니다.


감독: Jaromil Jires, 배우: Jaroslava Schallerová, Helena Anýzová, Petr Kopriva, Jirí Prýmek, Jan Klusák, Libuse Komancová, 다른 제목: Valerie and Her Week of Wonders

IMDb http://www.imdb.com/title/tt006651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7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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