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뒤몽의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은 샤를 페기의 희곡 [Les Mysteres de la charite de Jeanne d'Arc]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페기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프랑스의 시인으로 초기엔 사회주의자였다가 죽기 전엔 성당엔 안 가는 애국적인 가톨릭 신자가 된 모양인데, 잔 다르크의 엄청난 팬이었나봐요. 이 희곡말고도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책들을 많이 썼습니다. 당연히 잔 다르크가 우리가 아는 잔 다르크가 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도 텍스트는 심각합니다. 잔 다르크,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 가톨릭 신앙 모두 페기에겐 진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뒤몽도 페기와 같은 생각일까요? 그럴 리가요. 일단 21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뒤몽은 무신론자죠. 물론 무신론자여도 가톨릭 신앙에 대한 진지한 영화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기와 같은 입장일 수는 없어요. 페기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따른다면 그건 거짓말이 되겠죠. 물론 처음부터 페기의 잔 다르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정직한 태도겠지만 그건 이미 늦었어요.

뒤몽이 이 텍스트를 다룬 방식은...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이 영화의 텍스트를 그대로 놔둔 대신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여기까지는 이상할 거 없어요. 잔 다르크 프리퀄이니까 이 영화의 드라마는 대부분 내적 갈등이고 독백이나 대화를 통해 표현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로 전환될 수 있지요. 하지만 그는 이 영화를 제대로 된 뮤지컬로 만들 생각이 없어요. 그는 정통적인 뮤지컬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는 길을 일부러 피해갑니다. 일단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했어요. 로케이션 촬영을 고집했고요. 동시녹음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노래와 대사 전부 무척 날것입니다. 아, 그리고 잔 다르크가 전자 기타 반주에 맞추어 헤드뱅잉을 하는 영화예요. 중세 음악에 맞출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습니다.

영화는 의외로 진지해 보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대부분 엄청 진지해보여요. 그건 이들이 주어진 대사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해석을 넣을 여유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요. 초반에 잔 다르크로 나오는 어린 배우의 경우는 과연 텍스트를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영화가 그 배우에게 주는 대사는 결코 여덟살 아이가 자연스럽게 읊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니까요. 조금 더 나이 든 배우로 교체된 뒤에는 더 자연스러워지긴 하는데, 그래도 어색함은 어쩔 수 없죠. 야외에서 찍은 교회 학예회 같은 영화를 상상해보세요. 다들 조금씩 음치이고 몸치이고 국어책을 읽기를 하는데 진지하고 열심인 거죠. 웃음이 나오긴 하는데, 그래도 그 진지함은 감동적입니다. 솔직히 잔 다르크의 삼촌으로 나오는 배우는 너무 바보스럽게 나와서 좀 불쌍할 정도지만.

인터뷰를 읽어보면 뒤몽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서 텍스트를 고르다가 페기의 희곡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잔 다르크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뮤지컬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이미 나온 잔 다르크 영화와 차별화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1차 목표는 아니었나봐요. 진지하게 우상파괴나 신성모독을 할 생각도 없었던 거 같고. 하지만 시작이나 의도가 무엇이건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이 엄청나게 눈에 뜨이는 잔 다르크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요. (17/10/20)

★★★

기타등등
어린 잔 다르크로 나온 배우가 정말 김새론을 닮았어요.


IMDb http://www.imdb.com/title/tt634026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5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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