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베르무트의 2018년작 [누가 네게 노래를 불러줄까]는 무지 재미있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자기만의 [페르소나]를 찍었다면 나올 법한 이야기랄까요. 은퇴를 접고 10여년만에 콘서트를 준비 중이던 90년대 인기가수 릴라 카센은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콘서트가 코앞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릴라의 열성팬이며 모창가수인 비올레타를 불러와 자신에게 자기 노래를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온갖 드라마의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코미디가 될 수도 있겠군요. 알모도바르라면 이 설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끄집어냈을 겁니다. 하지만 베르무트의 영화는 느릿느릿한 아트하우스 영화이며 캐릭터의 얽힘과 드라마의 가능성에 대해 그렇게까지 큰 관심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예술, 삶, 모방, 사랑의 주제가 재미있는 모양으로 얽혀있고 이들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의 삶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긴 하지만 이게 드라마로 연결되지는 않아요.

여전히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아무리 드라마 안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발전되지는 않더라도 설정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결말까지 가면 이야기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트하우스 스타일의 집요함은 이 추상적인 주제와 나름 어울리기도 하고요. 영화 끝날 때까지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설정이 예고한 것처럼 신나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 이 소재는 정공법으로 치는 게 더 좋았을 거 같습니다. 배우들을 충돌시키며 화학반응도 시도해보고, 초반에 심어놓은 미스터리도 주인공들에게 직접 풀게 하고, 하여간 부지런하게 뭔가 했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이 영화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도구화된 빅토리아의 딸 마르타도 자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전 영화가 좀 쉬운 길을 간 것 같습니다. 아트하우스 영화의 형식이 종종 그 쉬운 길을 제공해줄 때가 있지요. (19/03/02)

★★★

기타등등
베르무트는 전작 [매지컬 걸]에서도 일본 대중문화 애호가 티를 냈는데, 이 영화를 찍을 때는 일본 가수 치아키 나오미의 삶에서 영향을 받았다는군요. 심지어 이 영화의 주인공 릴라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신도 가네토의 [벌거벗은 섬]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군요. 알겠어요.


감독: Carlos Vermut, 배우: Eva Llorach, Najwa Nimri, Carme Elias, Natalia de Molina, 다른 제목: Who will Sing to you

IMDb https://www.imdb.com/title/tt648530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9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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