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L'homme qui rit (2012)

2013.03.24 16:47

DJUNA 조회 수:11991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는 [레 미제라블]이나 [파리의 노트르담]처럼 자주 각색되는 작품은 아니죠. 소설을 읽어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멋진 설정과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나오긴 하지만 정작 서사의 매력은 없는 편이거든요. 캐릭터와 시대 묘사를 위해 책의 절반을 할애한 뒤 나머지 절반 동안 후닥닥 이야기를 풀어가는 스타일인데, 앞에서 공들여 묘사된 인물들이 고작 몇 페이지의 드라마에 잠깐 출연하고 후닥닥 퇴장하는 걸 보면 "도대체 뭐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장-피에르 아메리의 [웃는 남자]는 이 소설의 네 번째 영화 각색물입니다. 첫 번째는 1921년에 나온 독일 무성영화인데, 여기에 대한 정보는 얻기 힘들더군요. 두 번째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콘라트 바이트가 주인공 그윈플렌으로 나온 파울 레니의 무성영화죠. 세 번째 영화는 보도자료를 읽고 처음 알았는데, 1966년에 나온 이탈리아 영화로 무대를 보르지아 가문이 지배하는 이탈리아로 옮겼다고 합니다. 네 번째가 아메리의 영화죠. 그 외에 70년대에 나온 TV물이 있다고 하던데 역시 아는 바가 없고요. 고로 이 영화 이전에 제가 알고 있었던 그윈플렌 역 배우는 콘라트 바이트밖에 없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그윈플렌은 인신매매단의 수술로 얼굴이 기형이 된 소년으로, 해변에 버려진 채 떠돌다가 눈먼 여자아이 데아를 발견합니다. 데아와 그윈플렌은 우르수스라는 떠돌이 연예인 밑에서 쇼를 하면서 스타가 되는데, 알고 봤더니 그에겐 출생의 비밀이 있었죠! 순식간에 그는 무대를 떠나 귀족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되는데, 당연하지만 일은 그렇게 잘 풀리지 않습니다.

영화 각색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영화가 원작의 무대인 영국을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국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요. 근대 유럽의 어디여도 통할 막연한 곳이죠. 당연히 지명 같은 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요. 영국에 대해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빅토르 위고는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빅토르 위고가 그린 영국도 그렇게 영국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역사적 사실을 투여했어도 그의 영국은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어요. 그윈플렌, 데아, 우르수스, 바킬페드로, 하드콰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영국인 행세를 하는 책입니다. 파울 레니의 영화에 나오는 영국도 그렇게 영국적이지 않은 건 마찬가지고요. 전 그냥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분장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위고가 상상한 그윈플렌은 너무나도 못생겨서 보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파울 레니의 영화에 나왔던 콘라트 바이트는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분장을 보면 '멀쩡한 젊은이 하나가 일그러진 외모 안에 갇혀 있구나'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그윈플린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그냥 입 양쪽에 찢어진 흉터 자국이 있는 잘생긴 젊은이입니다. 당시 유럽엔 그 정도 얼굴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인기가 있었을 걸요. 결투 때문에 얼굴 상처가 흔했던 때니까.  

당연히 그윈플렌의 존재감은 사정없이 위축됩니다. 영화의 드라마는 모두 그윈플렌이 정말로 눈에 뜨이는 외모일 때야 가능하니까요. 이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왜 무대의 그윈플렌에게 매료되는지도 알 수 없고, 그윈플렌의 장엄한 연설이 이렇게 조롱감이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각본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뿐이죠. 이렇게 되면 스토리 전체가 '그러려니' 하는 기분에 끌려가게 됩니다. 드라마를 진지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는 것이죠.

대부분을 사운드 스튜디오 안에서 찍은 화면 때문에 고풍스러운 사극의 멋을 풍기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에요. 영화는 위고의 원작에 있는 분노도 없고, 파울 레니의 영화에 있었던 그로테스크한 멜로드라마의 향취도 없습니다. 만들면서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감이 안 와요.  (13/03/24)

★★

기타등등
1, 많이들 아시겠지만, 콘라트 바이트의 [웃는 남자] 분장은 [배트맨] 만화의 조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번 [웃는 남자]의 분장은 [다크 나이트]에 조커로 나왔던 히스 레저의 분장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더군요. 이런 식으로 영향은 빙빙 돌고...

2. [웃는 남자 - 조커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영화를 팔아야 하는 걸까요.

감독: Jean-Pierre Améris, 배우: Gérard Depardieu, Marc-André Grondin, Emmanuelle Seigner, Christa Theret, Arben Bajraktaraj, Swann Arlaud, Barkilphedro,  다른 제목:  The Man Who Laughs

IMDb http://www.imdb.com/title/tt194628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7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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