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안네 쾨프케는 1971년 12월 24일 페루에서 일어났던 란사 플라이트 508호 추락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엄마와 함께, 아빠가 일하는 푸칼파에 가다가 그 끔찍한 일을 당했죠. 생각해보세요. 93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비행기가 3.2킬로미터 상공에서 벼락을 맞고 폭발했습니다. 산산조각난 비행기의 잔해와 승객들이 페루의 열대우림지대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어요. 그런데 이 17살 소녀는 그 지옥과 같은 참사 속에서 살아남았던 겁니다. 추락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12일 동안 악착 같이 걸어서 문명 세계로 빠져나왔지요.

이러니, 베르너 헤어조크가 쾨프케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해보입니다. 너무나도 헤어조크다운 사건이니까요. 하지만 쾨프케와 란사 플라이트 508호 추락사건에 대한 헤어조크의 관심은 보다 개인적입니다. 당시 쾨프케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헤어조크도 같은 곳에 있었고 심지어 그 비행기를 탈 뻔도 했었답니다. 쾨프케가 방황하고 있던 페루의 밀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헤어조크는 [아귀레: 신의 분노]를 찍고 있었고요. 이 정도면 운명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2000년에 방영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희망의 날개]에서, 헤어조크는 쾨프케를 추락현장으로 불러들입니다. 아직도 잔해가 남아있는 추락장소까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함께 가서 71년 쾨프케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다시 밟아가는 것이죠.

뭔가 눈물 짤 법한 이야기가 나올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냉정하고 차분합니다. 율리안네 쾨프케라는 사람이 원래 그런 감수성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에요. 조그만 몸집에 평범하게 생긴 안경잽이 독일인 아줌마가 당시의 소름끼치는 상황을 어떤 감정도 섞지 않고 냉정한 과학자의 태도로 이야기할 때는 거의 경외감이 느껴질 지경입니다.

쾨프케는 감정적 고통을 느끼지 않는 괴물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런 고통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정적 보호막을 만들어낸 사람이지요. 그 때문에 쾨프케의 냉정함은 영화에 강렬한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그건 종종 쾨프케로부터 인간적인 반응을 끌어오고 싶어하는 헤어조크와의 결투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런 결투가 진짜로 있었다면 이긴 건 쾨프케 같군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쾨프케는 차분하기 그지 없고, 헤어조크는 쾨프케가 잠시 침착함을 잃었던 순간을 카메라로 잡지 못한 걸 억울해하는 것 같으니까요.

새로운 여정을 따라 다시 이야기되는 쾨프케의 모험담 역시 쾨프케를 닮았습니다. 17살짜리 독일 소녀가 남미의 밀림에 떨어졌다니, 애처롭게 들리죠? 하지만 쾨프케는 생물학자인 부모와 함께 평생을 남미에서 살았고, 밀림에 대해 웬만한 어른들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동물이 진짜로 무섭고, 길을 찾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서바이벌리스트와 과학자의 태도 모두를 갖고 있었지요. 쾨프케의 이야기는 모험물로서도 흥미진진하지만 지적인 재미도 만만치 않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그 뒤로 부모의 뒤를 이어 생물학자가 되었어요. 경험으로나, 직업으로나, 자신이 겪은 사건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디터 뎅글러 때 그랬던 것처럼, 헤어조크는 쾨프케의 이야기 역시 장편 극영화로 다시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그 영화도 재미있었겠죠. 하지만 이미 이탈리아에서 1974년에 이 이야기가 [I miracoli accadono ancora/Miracles Still Happen]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진 적 있습니다. 쾨프케와 헤어조크 모두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모양으로, 쾨프케는 영화의 묘사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꼼꼼하게 설명하고, 헤어조크는 주연배우의 형편없는 연기를 놀려대더군요. 쾨프케야 자기 이야기이니, 그런 불평을 늘어놓을 자격이 있지만, 헤어조크가 그런 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든 사람들이 헤어조크처럼 영화를 만들 거나, 헤어조크 영화에 나올 수는 없고, 그 '형편없는 배우'는 어린 나이에 남미의 밀림에서 거의 모든 스턴트를 자기가 다 했다던데. (12/06/19) 

★★★☆

기타등등
사실은 쾨프케의 어머니도 추락 당시에 살아남았었대요. 하지만 딸처럼 운이 좋지 못해서 추락 며칠 뒤에 죽었다고 합니다. 

감독: Werner Herzog, 출연: Juliane Koepcke, Werner Herzog, Juan Zaplana Ramirez,  다른 제목: Wings of Hope

IMDb http://www.imdb.com/title/tt024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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