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2012)

2012.11.23 23:31

DJUNA 조회 수:8006


허철의 [영화판]은 한국 영화계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막연한 소개가 있을까요.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역사와 현실을 83분의 러닝타임 안에 담으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현재 한국 영화계의 시스템이나 성차별, 할리우드와의 관계를 다루다가 중간부터는 5,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역사를 그대로 뚫고 지나가죠.

영화는 대부분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러진 화살]을 찍기 전의 정지영이 배우 윤진서와 함께 촬영장이나 술집,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영화계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죠. 그러는 동안 영화 중간중간에 이야기 소재인 영화의 스틸들이 삽입되는데, 대부분 비디오를 캡처한 듯한 조악한 화질입니다. 이런 걸 쓰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고.

영화의 재미 대부분은 이야기의 재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직접 겪은 당사자들이 자기가 겪거나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특별한 순서 없이 푸는데, 그 중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전 장준환 감독이 [남부군] 엑스트라였다는 건 이 영화를 보고 알았네요. 

하지만 야심에 비해 영화가 너무 작습니다. 아니면 영화에 비해 야심이 너무 크거나요. 그 때문에 영화는 방향도, 중심도, 목적도 불분명한 교과서 비슷한 모양이 됩니다. 사실 이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의 역사를 배우는 건 거의 무의미합니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고, 모르는 사람들에겐 정보가 너무 빽빽하니까요. 구술 자료들이 재미있긴 하지만, 이미 이를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수집하는 곳이 있습니다. 교과서로서 [영화판]만의 장점은 없다고 봐야겠죠.

결국 남는 건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기회를 상당히 놓쳐버렸지요. 가장 아쉬운 건 정지영과 김지미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도 의미있는 내용을 담은 대화 하나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죠. 하긴 그게 가능했다면 오히려 신기했겠지만. 정지영이 CJ의 담당직원을 만나봤자 들을 수 있는 건 보도자료를 읽는 것 같은 뻔한 이야기밖에 없고.

영화의 계획도 계산착오 위에 서 있습니다. 허철은 윤진서와 정지영에게서 세대의 갈등과 대립을 기대했던 모양인데, 이 사람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이 나라가 어떤 곳인지 정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까? 이 나라에서 그 나이의 젊은 여자 배우가 선배들에게 취할 수 있는 태도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어떻게 모르죠? 이 영화의 원래 계획이 망가지는 과정 자체가 한국 영화계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차라리 영화계 사람들을 모아 술집에 가두고 온갖 이야기를 다 하게 해서 [마이 디너 위드 앙드레]스러운 영화를 만들었다면 오히려 그럴싸했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두서가 없다고 해도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위계질서와 예의 속에서 모두가 좋아할 이야기만 나왔을 수도 있고. (12/11/23)

★★☆

기타등등
2009년에 찍은 영화라 이명세와 윤제균의 사이가 아직 좋더군요. 그들이 하는 이야기보다는 그 뒤에 벌어질 이야기를 상상하는 게 더 재미있더라고요.

감독: 허철, 배우: 윤진서, 정지영, 문소리, 배종옥, 안성기, 박중훈, 김수용, 김혜수, 이창동,  다른 제목: Ari Ari the Korean Cinema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Ari_Ari_the_Korean_Cinem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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