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느긋하게 나선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한 명은 이 영화의 감독 사라 폴리이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의 마이클 폴리입니다. 계단 끝 녹음실에 도착한 마이클 폴리는 감독 자리에 앉은 딸을 마주하고 자신이 쓴 원고로 영화의 내레이션을 읽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촬영 준비를 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부분 사라 폴리의 오빠나 언니들이지만, 우리가 아직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퍼스트 네임 뿐이죠. 하여간 이들은 카메라 뒤에 서 있는 감독과 편하기 짝이 없는 사이로,  관객들은 곧 이 친근한 분위기에 감염됩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소개되는 영화의 주인공은 사라 폴리가 11살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 다이앤입니다. 딸에게 미모를 물려준 게 분명한 이 사람은 분명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로, 남편과 딸처럼 배우이기도 했고, 캐스팅 디렉터이기도 했습니다. 사라 폴리가 아역배우로 데뷔한 것도 엄마 덕분이라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사라 폴리의 영화 경력은 가볍게 지나가는 배경묘사에 불과하죠.

사라 폴리 자신이 고백하듯, 이후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거의 소프 오페라입니다. 우리나라 연속극 시청자들도 친근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예요.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감상하실 생각이라면 여기서 나가시길. 아니, 도대체 그럴 생각이면 왜 처음부터 여기에 있는 겁니까?) 출생의 비밀 이야기죠! 사라 폴리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는 별로 닮지 않았다는 말을 들어왔고, 가족들은 막내 동생이 태어나기 몇 달 전 엄마와 연극을 공연했던 세 배우들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인가에 대해 농담을 해왔던 모양입니다. 이게 어느 순간부터 진지해졌고, 폴리는 당시에 진짜로 엄마랑 잔 남자가 누군지를 찾아나섭니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 그 사람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연예가 가십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충격적인 반전을 뒤에 깐 추리물도 아닙니다. 폴리가 진짜 아빠를 찾아나서는 과정은 추리소설과 같은 재미를 주지만, 진상의 폭로가 영화의 정점은 아닙니다. 정말 그랬다면 이 영화는 그냥 흔한 통속극으로 끝났겠지요. 사실 이야기 자체는 어느 가족에게나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단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유명한 감독/배우의 어머니라는 게 다를 뿐이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다이앤이라는 인물을 영화를 통해 그려내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인터뷰를 통해 회상의 조각들을 하나씩 조립해나가는 과정은 조금 [라쇼몽]스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만들어내는 다이앤 폴리라는 인물은 그 가끔씩 충돌하고 어긋나는 재료들 때문에 더 인간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아마 한국 연속극의 주인공들은 다이앤을 회상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들은 모두 다이앤의 불륜과 거짓말과 실수에 대해 관대하기 그지 없어요. 그것들은 모두 그들이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의 일부입니다. 비록 그 사실이 충격적이더라도 그들은 죽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함께했던 과거, 죽음 뒤에 남겨진 현재를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조용한 전쟁이 있습니다. 누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회상하는 다이앤을 맨 앞에 놓을 것인가. 누가 이를 통해 자신을 최종 승자로 선언할 것인가. 이 알력은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진행되지만 그 때문에 작정하고 희극적이기도 합니다. 

사라 폴리는 이런 알력을 숨기는 대신 전면에 끄집어냅니다. 그 과정 중 폴리가 찍는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가 드라마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폴리의 다큐멘터리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고, 이들 중 한 명은 폴리의 관점에 반대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영화를 끌어갈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려고도 하고요. 

폴리는 이 날이 선 전쟁터의 혼란을 최대한으로 이용합니다. 영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자기 자신이지만, 기본 내레이션은 아버지가 직접 쓴 원고와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용하지요. 이 영화의 이야기꾼들은 언제든지 카메라 뒤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감독과 맞설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폴리는 자신이 가진 도구와 속임수들을 공개합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홈무비 클립 사이에 끼워넣은 가짜 클립들의 촬영현장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그 결과 만들어진 영화는 선댄스 같은 데에 종종 소개되는 자전적인 가족 다큐멘터리의 나르시시즘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습니다.  폴리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가 '나'만의 이야기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13/05/26)

★★★☆

기타등등
사라의 언니 조안나는 정말 동생과 판박이더군요. 머리색과 잇몸만 빼고. 

감독: Sarah Polley, 배우: Sarah Polley, Michael Polley, Diane Polley, Harry Gulkin, Rebecca Jenkins, Alex Hatz, Peter Evans

IMDb http://www.imdb.com/title/tt236645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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