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1935)

2013.02.09 19:48

DJUNA 조회 수:12378


전 언제나 리처드 볼레스와프스키가 1935년에 감독한 [레 미제라블]이 궁금했죠. 소문은 좋지만 볼 수 없는 영화였으니까요. 얼마 전에 루이스 마일스턴이 감독한 1952년작 [레 미제라블]과 함께 DVD로 나와서 주문을 해 봤습니다. 음, 실망이었어요. 세월이 흘러도 자신만의 힘을 잃지 않는 작품이 있고 세월과 함께 시들어가는 영화도 있는데, 볼레스와프스키의 영화는 후자입니다.

어떤 모양의 영화인지 설명해드리죠. 일단 기본 구조부터. 1시간 50분짜리입니다. 초반 30분 정도가 장 발장의 개심 이야기인 1부입니다. 재판 장면, 갤리선 생활까지 그리면서 아주 꼼꼼하게 넘어가요. 그 다음 30분 정도는 장 발장이 마들렌 시장 노릇을 하는 2부. 나머지 50분 정도가 코제트가 성인이 된 이후를 다룬 3부입니다.

비교적 자유로운 각색입니다. 아니요. 자유롭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원작보다는 당시 할리우드의 모럴 코드에 더 얽매어 있는 영화입니다.  피가 끓는 원작과 비교해보면 영화의 내용은 지나치게 얌전하고 달짝지근하며 조금은 비겁하고 기만적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 사람들이, 애들은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소재는 모두 잘라냈다고 보면 됩니다.

일단 팡틴부터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는 팡틴의 매매춘 이야기가 없습니다.  심지어 코제트는 사생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팡틴이 그 동안 겪었던 빈곤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어요. 그냥 검소하게 차려입은 병약한 젊은 여자인 겁니다.  심지어 영화는 팡틴에게 험악한 결말을 주기 싫었는지, 코제트를 조금 일찍 데려와 팡틴과 만나게 합니다. 

영화는 이야기에서 프랑스 역사를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바리케이드가 흐릿하게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는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막연한 학생 데모예요. 심지어 마리우스는 자신이 혁명가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그의 유일한 정치적 입장은 부당한 형법을 개정하자는 것이죠. 그 역시 빈곤 같은 건 겪은 적이 없어 보입니다. 심지어 여기서 마리우스의 비서 노릇을 하는 에포닌도 팁을 꽤 넉넉하게 받는 술집 아가씨 같습니다. 테나르디에 부부요? 2부에 잠시 나오는 엑스트라입니다. 전 자베르의 자살로 끝나는 빌 어거스트의 [레 미제라블]의 결말이 싫었지만, 알고 봤더니 그 결말은 바로 이 영화에서 먼저 써먹었더군요.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심지어 이 영화는 제가 어린 시절 읽었던 축약판보다 더 얌전합니다. 적어도 제가 가진 축약판에서는 마리우스가 어쩌다가 바리케이드 뒤에 있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요. 유신정권 때 나왔던 어린이책인데도 이 영화보다는 정직했어요.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이 빅토르 위고를 각색하고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영화의 태도는 프랑스적이라기보다는 영국적이고 빅토르 위고보다는 찰스 디킨스에 가깝습니다. 원작의 열정과 정치성은 사라지고 맥없고 차갑고 감상적인 기독교적 정서만 남지요. 장 발장이 개심하는 장면에 흐르는 힘없는 [아베 마리아] 합창을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로맨스는 마치 대학 미팅에서 만난 커플들의 이야기처럼 지루하고요. 그나마 어느 정도 생기가 도는 부분은 장 발장이 코제트에게 거의 근친상간적인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이건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던 모양이죠?

당시 할리우드의 일급 전문가들이 똘똘 뭉쳐 만든 영화입니다. 장 발장 역의 프레드릭 마치, 자베르 역의 찰스 로튼은 모두 훌륭한 배우들이죠.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조금씩 캐릭터와 어긋나 보입니다. 특히 프레드릭 마치요. 위에 제가 붙인 사진을 보세요. 장 발장의 재판 장면에 나오는 마치인데, 암만 봐도 장 발장보다는 시드니 칼튼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하긴 장 발장이 재판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에서도 그는 일자무식 프랑스 노동자보다는 변호사 같아요.

극장용 영화가 무조건 원작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원작인 19세기 대중소설보다 얌전하고 검열된 버전으로 각색된 20세기 대중영화를 보는 건 별로 즐거운 경험이 아닙니다. 운동권 오빠들이 적기를 휘두르는 뮤지컬 영화의 패기 같은 건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13/02/09)

★★☆

기타등등
프랑스에서 [레 미제라블]을 만들면, 장 발장 역은 아리 보르, 장 가뱅, 르노 방투라와 같은 서민적 이미지의 배우들에게 갑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레 미제라블]을 만들면 이 역은 휴 잭맨, 프레드릭 마치, 마이클 레니와 같은 조각 같은 외모의 배우들에게 가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감독: Richard Boleslawski, 배우: Fredric March, Charles Laughton, Cedric Hardwicke, Rochelle Hudson, Florence Eldridge, John Beal, Frances Drake, Ferdinand Gottschalk, Jane Kerr, Marilyn Knowlden

IMDb http://www.imdb.com/title/tt0026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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