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1964)

2020.05.07 23:23

DJUNA 조회 수:1675


일단 기초 정보부터 나열하기로 하겠습니다. 1913년 조지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연극을 발표합니다. 헨리 히긴스라는 음성학자가 일라이자 둘리틀이라는 꽃파는 아가씨를 심한 사투리를 고쳐 무도회에 내보내겠다는 내기를 건다는 내용이었지요. 이는 음성학에 대한 작가의 오래된 관심, 음성학자 헨리 스위트와의 친분에서 시작되었고, 언제나처럼 사회 비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그렇게 당연히 생각하는 계급 사이의 장벽은 발음을 고치는 간단한 작업만으로도 간단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일라이자와 히긴스는 맺어지지 않았습니다. 쇼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었고, 두 캐릭터 사이에 성적 긴장감이 있다고 해도 결혼까지 갈 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둘이 맺어진다면 쇼가 노린 사회 비판이 깨지겠지요. 그리고 제목을 딴 피그말리온의 전설을 그대로 따르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중은 이 결말에 당황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수정하려 했습니다. 쇼는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두 사람이 헤어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후일담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1938년에 나온 가브리엘 파스칼의 영화 [피그말리온]은 결국 일라이자와 히긴스가 맺어지는 결말로 끝나 버렸습니다. 쇼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탔기 때문에 (밥 딜런이 노벨상을 타기 전까지는 아카데미상과 노벨상을 탄 유일한 작가였습니다) 쇼가 직접 고쳤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건 파스칼이 한 짓이었고 쇼는 시사회에서 보기 전까지 몰랐다고 해요.

1956년, 앨런 제이 러너와 프레더릭 로 콤비가 [피그말리온]의 원작을 바탕으로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을 만듭니다. 이 작품은 대성공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결말은 파스칼의 버전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런던과 브로드웨이에서 일라이자 둘리틀과 헨리 히긴스를 연기한 배우는 줄리 앤드루스와 렉스 해리슨이었습니다. 해리슨은 음치였지만 뮤지컬의 노래를 낭송하듯 불러서 이후에 노래를 제대로 부르는 후배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만들었지요.

1964년, 조지 큐커가 이 작품의 영화판을 발표합니다. 당시 유행했던 화려한 70밀리 대작이었지요. 오리지널 캐스팅의 렉스 해리슨과 스탠리 할로웨이가 불려왔지만 일라이자 둘리틀 역은 줄리 앤드루스 대신 오드리 헵번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헵번이 더 스타이긴 했지요. 뮤지컬 경력도 없지는 않았고. 하지만 줄리 앤드루스에 비하면 엄청난 미스 캐스팅이었고 노래 실력도 딸렸습니다. 헵번은 모든 노래를 직접 불렀지만 결국 마니 닉슨이 다시 더빙하고 말았습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아카데미 8개부분에서 수상했지만 헵번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그 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탄 건 [메리 포핀스]의 줄리 앤드루스였지요. 오스카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자, 정리가 되었습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좋은 영화인가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나요? 둘 다 '예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 시절 머릿속에 각인된 작품이에요. 지금도 [I Could Have Danced All Night] 같은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쿵쿵 뜁니다. 제 선호도를 떠나 이 영화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오락 작품입니다. 아주 영화적이지는 않아요. 녹화된 연극이지요. 하지만 조지 큐커와 같은 감독이 '영화적인' 작품을 만들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 상태일 때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거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녹화된 연극'이라도 할리우드의 장인들이 최상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건 '최상의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술적으로 다중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조지 버나드 쇼의 원래 대사와 드라마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쇼는 감상주의 따위는 관심이 없는 날카로운 위트의 지식인이었고 사회주의자였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뮤지컬로 각색한 앨런 제이 러너는 이 작품의 화려한 표면만 봅니다. 러너에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더럽고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꽃파는 소녀가 아름다운 상류사회의 숙녀로 탈바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수행한 음성학자와 꽃파는 소녀는 사랑에 빠집니다.

이 두 이야기는 전혀 섞이지 않고 병행 진행됩니다. 이들이 대사를 읊을 때는 쇼의 드라마를 따릅니다. 하지만 음악이 흐르고 노래를 시작하면 앨런 제이 러너의 신데렐라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죠. 그럴 때마다 캐릭터들은 감상적이 되고 더 로맨틱해지고 더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종종 캐릭터들은 찢어져버립니다. 특히 결말은 더 그래요. 대사 파트만 보면 후반부의 일라이자는 완전히 마음을 먹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히긴스에게서 독립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프레디와 결혼하기로요. 하지만 히긴스가 [I've Grown Accustomed to Her Face]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좋은 노래입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버전을 가장 좋아해요) 영화는 쇼가 단호하게 끝낸 결말을 떠나 소위 '해피 엔딩'으로 흘러갑니다. 그렇다고 그 결말이 이 이야기에 잘 붙느냐? 그럴 리가 없지 않나요? 파스칼 버전에서도 결말은 억지로 붙은 것 같았습니다.

다음 문제는 오드리 헵번의 캐스팅입니다. [마이 페어 레이디]를 오드리 헵번 영화로 감상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노래는 다른 사람이 불렀지만, 헵번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영화 내내 빛이 납니다. 오드리 헵번 특별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자연스럽지요. 하지만 알아서 빛나는 헵번의 스타성을 잠시 미루어 보면 이 캐스팅은 진짜로 이상합니다. 일라이자 둘리툴은 자존심이 강한 노동자 계급의 여자이고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이 캐릭터는 바뀌지 않습니다. 전반부의 일라이자와 후반부의 일라이자는 같은 사람이에요. 단지 후반부의 일라이자는 상류 사회의 억양을 쓰고 어휘가 늘었을 뿐입니다. 당연히 캐릭터의 계급적 정체성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정반대로 보여요. 정체불명의 칵테일 악센트를 쓰며 꽃파는 아가씨로 나올 때는 연기하는 것 같고 무도회의 스타가 되었을 때는 그냥 오드리 헵번 같지요. 앨런 제이 러너가 각본을 쓴 뮤지컬 영화에서는 이게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지요.

[마이 페어 레이디]는 빛나는 장면이 많고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여전히 좋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라는 말로 영화의 발목을 잡는 건 좋은 리뷰어의 습관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A급 작가의 비전과 드라마를 통속적인 대중작가가 달짝지근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물이 좋다는 게 더 짜증이 날 수도 있겠군요. 전 그냥 [I've Grown Accustomed to Her Face]부터 '뮤지컬 히긴스'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더 논리에 맞는 거 같아요. (20/05/07)

★★★☆

기타등등
1. 원작에서는 어떻게 끝나냐고요? 조지 버나드 쇼의 후일담에서 일라이자는 프레디와 결혼합니다. 프레디는 상류사회 출신이지만 돈이 별로 없어서 두 사람은 채소와 꽃을 파는 가게를 차립니다. 한 동안 고전하지만 결국 성공하지요. 이 결말, 참 현실적이고 좋지 않나요. 솔직히 일라이자와 히긴스는 둘 다 성격이 강해서 서로를 참지 못했을 겁니다. 파스칼의 영화를 위해 쇼가 쓴 각본에서는 히긴스가 이 둘을 축복하면서 끝난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쇼도 양보를 해 준 것이었는데.

2. 프레디 역의 제레미 브렛이 그라나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홈즈라는 건 DVD가 나온 뒤에야 알았지요. 거의 디즈니 파멜라 프랭클린과 호러 퀸 파멜라 프랭클린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개안.

3. 한동안 [마이 페어 레이디]의 리메이크 계획이 돌았습니다. 엠마 톰슨이 각색에 참여했고, 키라 나이틀리, 캐리 멀리건 같은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지요. 그런데 그게 잘 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 동안 톰슨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드리 헵번이 노래도 못하고 연기도 못하는 배우라고 말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어요. 좀 아쉽습니다. 21세기의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이 이야기와 노래를 보완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리메이크되는 시대라면 새 버전의 [마이 페어 레이디]도 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4. 전 [마이 페어 레이디]보다 마고 키더와 피터 오툴이 주연한 [피그말리온] TV 드라마를 AFKN에서 먼저 보았습니다. 그 작품은 쇼의 원작 결말을 따르고 있어요.


감독: George Cukor, 배우: Audrey Hepburn, Rex Harrison, Stanley Holloway, Wilfrid Hyde-White, Gladys Cooper, Jeremy Brett, Theodore Bikel, Mona Washbourne, Isobel Elsom, John Holland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58385/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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