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그라프의 [파비안]은 에리히 캐스트너의 동명소설을 영화한 작품이죠. 원작은 전혜린 번역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읽었을 때도 낡은 번역이었는데 지금 읽으면 더 낡아 보이겠지요. 나치가 집권하자 이 책은 분서대상이 되었고 캐스트너는 집필정지를 당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책의 내용이 완성되는 거 같아요.

제목의 파비안은 주인공 이름입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청춘이지요. 초반의 파비안에겐 직장도 있고 친구도 있고 심지어 여자친구도 사귀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온갖 부조리한 일들을 겪는 동안 모든 걸 잃습니다. 파비안의 곤경은 당시의 사회상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원래부터 그냥 부조리하기 때문이 그런 거죠. 그걸 가장 놀리듯 보여주는 게 바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만.

영화 [파비안]은 원작을 21세기 관점에서 재해석합니다. 그 뒤 독일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 아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시대와 1920년대 말을 연결시키는 거죠. 아카데미 비율과 쨍한 디지털 화면도 이 둘의 혼합을 노린 것 같습니다.

영화의 현대 베를린의 지하철역 안에서 시작됩니다. 카메라가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을 따라 역에서 나오면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베를린이 기다리고 있지요. 톰 쉴링이 연기한 파비안은 아무리 봐도 20세기에 떨어진 21세기 청년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원작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계속 추가적인 설명을 붙입니다. 심지어 영화는 (퍼스트 네임이 두 번 겹치는 것 같은) 주인공의 이름까지도 설명해요. 가장 두드러지는 건 친구 라부데의 마지막 운명인데, 허무한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극우화되어가고 있던 당시 젊은 지식인 남자들을 등장시켜 그 허무해보이는 사건에 정치적인 동기를 추가하는 식이지요. 이는 효과적인 메시지를 주지만 원작의 날카롭고 잔인한 아이러니를 포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건 영화의 결말도 마찬가지죠. 원작의 뜬금없는 결말을 그대로 담을 수 없었는지 영화는 이를 예견하는 복선과 암시를 끊임없이 심습니다. 캐스트너가 봤다면 질색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냥 농담이었는데요.

그 결과 영화는 좀 둔중해져요.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요. 무기력한 남자 청년을 3시간 동안 구경하는 건 확실히 좀 지치는 경험이지요. 개인적으로 영화가 주인공에게 훨씬 단호했다면 보다 짧고 효과적인 영화가 나왔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파비안이 의미없고 과잉해석된 존재냐. 글쎄요. 20세기의 텍스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21세기 남자로서 영화 속 파비안의 존재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스트너와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이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론적인 풍경은 오싹할 수밖에 없어요. (21/10/14)

★★★

기타등등
원작은 1980년에 한 번 영화화된 적이 있습니다. 잘 기억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만.


감독: Dominik Graf, 배우: Tom Schilling, Saskia Rosendahl, Albrecht Schuch, Meret Becker, Michael Wittenborn, Petra Kalkutschke, Elmar Gutman, Aljoscha Stadelmann, Eva Medusa Gühne, Lena Baader 다른 제목: Fabian – Going to the Dogs

IMDb https://www.imdb.com/title/tt1384641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02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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