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The Immigrant (2013)

2015.09.07 21:05

DJUNA 조회 수:8922


제임스 그레이는 푸치니의 [삼부작 오페라]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수녀 안젤리카]를 보면서 바바라 스탠윅이나 그리어 가슨 같은 배우들이 나왔던 옛날 할리우드 '여성 영화'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자는 계획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해 러시아에서 이민 온 조부모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왔다고 해요.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마리옹 코티아르가 연기한 에바가 겪은 일들을 할머니가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고풍스러운 신파입니다. 1921년, 주인공 에바는 동생 마그다와 함께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왔어요. 하지만 마그다는 폐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엘리스 섬의 수용소에 감금되고 에바도 추방당할 위기에 놓이는데 갑자기 브루노 와이스라는 남자가 짠하고 나타나서 에바가 뉴욕 땅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브루노는 알고 봤더니 사기꾼이고 포주입니다. 에바는 브루노 밑에서 벌레스크 쇼에 출연하고 매춘일을 하면서 동생을 수용소에서 꺼낼 돈을 모으죠. 그런데 어느 날 브루노의 사촌이라는 마술사 올란도가 둘 사이에 끼어듭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그레이는 40년대 '여성 영화'를 목표로 삼은 모양이지만 전 릴리언 기시 같은 배우들이 나왔던 무성영화들이 더 먼저 떠올라요. 내용보다는 마리옹 코티아르의 얼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 꽤 넓게 퍼져 있죠.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호스티스 영화 이야기가 비슷한 길을 갑니다. 이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어느 시대이건 우린 평범한 여자들보다 미인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요. 통속물의 익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이런 정보편향인 것 같습니다. [이민자] 역시 여신과 성녀, 매춘부와 도둑의 극단적인 이미지를 한 몸에 품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미인의 이야기죠. 하긴 코티아르를 캐스팅해놓고 이 사람을 평범한 외모를 가진 보통 사람 취급한다면 그건 그냥 거짓말이죠.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이 미인의 전형적인 운명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루노 와이스는 그 미인을 사랑하면서도 착취하는 소위 '나쁜 남자'이고 올란도는 미인에게 다소 믿을 수 없는 희망을 주는 수상쩍은 사기꾼 같은 인물입니다. 다들 어디에선가 가져온 전형성을 연기하고 있고 그들의 운명도 그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아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반대로 영화는 이 전형성을 거의 오페라처럼 다루고 있어요. 오페라의 비유를 조금 더 연장한다면 이야기 자체보다는 가수와 음악이 더 중요한 것이죠.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빛나면 익숙한 이야기는 여분의 의미와 힘을 얻습니다. 무엇보다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예요. 천박하고 한심한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결과물은 그냥 빛이 납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코티아르가 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군요. 마리옹 코티아르 여신 숭배가 취미이신 분들은 그냥 가서 보세요.

당연히 미국 이민사에 대한 이야기죠. [이민자]는 사실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엘리스 섬을 떠나지 않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에바야 간신히 뉴욕에 발을 디디긴 했지만 마그다와 함께 하기 전까지는 미국에 진짜로 왔다고 하기 어려우니까요. 한마디로 영화 전체가 유럽인 여자가 미국인이 되기까지 겪어야 하는 긴 통과제의입니다. 그리고 그 통과제의를 주도하는 건 또다른 이민자 출신의 미국인이고. 이 연쇄과정의 작은 부분을 그리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여기에는 엄연한 성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연쇄과정이란 말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죠. 그리고 전 브루노의 가학성과 피학성이 뒤섞여 있는 악덕과 참회의 과정을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이 안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뛰어나지 않다거나 결말의 울림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요. 그냥 클리셰가 먼저 보일 수밖에 없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15/09/07)

★★★☆

기타등등
마리옹 코티아르는 이 영화를 위해 20페이지 분량의 폴란드어 대사를 읊어야했죠. 두 달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집중 교육을 받은 모양인데, 조성용님이 아는 폴란드 평론가에 따르면 꽤 잘 한다는데요?


감독: James Gray, 배우: Marion Cotillard, Joaquin Phoenix, Jeremy Renner, Dagmara Dominczyk, Jicky Schnee, Elena Solovey, Maja Wampuszyc, Ilia Volok, Angela Sarafyan

IMDb http://www.imdb.com/title/tt195118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8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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