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2012)

2013.03.16 18:57

DJUNA 조회 수:18270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의 3분의 2 길이인 대작이지만, 의외로 영화화하기 쉬운 소설입니다. 왜일까요? 그건 소설에서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분량이 얼마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든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세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안나 카레니나가 아니라 안나 카레니나와 그 주변 사람들 전부, 아니, 19세기 말 러시아의 상류 사회 전체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건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히려 비중이 적은 편이죠. 이 소설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주인공을 가장 많이 반영한 인물은 레빈입니다. 레빈의 아내가 되는 키티가 아마 그 다음으로 비중이 큰 인물일 겁니다. 안나는 그 다음이죠. 아니, 그 다음,다음인지도. 어차피 소설은 안나 없이 시작해서 한참 가고, 안나가 죽은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갑니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에 의외로 인색해요. 우리는 안나가 브론스키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그건 키티의 관점에서 묘사되니까요. 카레닌 부부가 맞은 파경도 안나보다는 카레닌의 관점에서 묘사되고요. 그 뒤의 묘사로 가면 이제 브론스키의 관점이 뒤를 잇습니다. 안나의 자살 직전에 나오는 폭포수와 같은 심리묘사는 아주 드문 편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톨스토이가 만든 온갖 이야기들을 다 무시하고 안나 카레니나만 주인공으로 각본을 쓰면 특별히 내용을 줄이지 않아도 장편영화 한 편 정도의 분량이 나온다는 것이죠. 이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전쟁과 평화]보다 더 자주 영화화되는 이유는 이로써 설명할 수 있겠지요. 만들기 쉬운 것이죠.

각색물이 많으면 차별화의 필요가 있습니다. 조 라이트와 각본가 톰 스토파드는 조금 새로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들은 이 영화를 절반 정도 연극 실황 중계처럼 만들었습니다. 영화의 상당부분은 극장 안에서 벌어집니다. 대부분은 무대 위. 하지만 관객석, 무대 뒤, 무대 위도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활용됩니다.

많이들 베리만의 [마술피리]를 생각하실 텐데, 그와는 다릅니다. 베리만의 영화에서 극장은 오페라를 공연하는 공간이죠. 앞에는 관객들이 있고, 무대 뒤에는 공연을 보조하는 스태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극장 전체가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예를 들어 레빈은 형의 연락을 받고 무대 뒤로 돌아가 계단을 올라 무대 위 구석에 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형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무대 자체도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무한한 공간이 열려 있고 제4의 벽이 소멸되는 환상적인 공간입니다. 그리고 종종 영화는 막을 확 열어 젖히고 무대를 실제 러시아의 평원으로 옮깁니다. 레빈의 이야기는 대부분 극장 밖에서 일어나요.

많이들 이런 극장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스토리에 집중하는 데에 애를 먹는다고 말하는데, 전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트릭들은 대부분 초반부에 집중되어 있고 주로 설명이 필요한 공간 이동이나 일반적인 영화적 묘사로는 쉽지 않은 집단 묘사에 활용됩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무대 트릭은 연극에서 일상적입니다. 연극 관객들은 그 때문에 몰입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아요. 전 좀 엄살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안나의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면들은 대부분 전통적입니다. 게다가 이런 트릭 때문에 영화가 보통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절약했는지 눈치채셨는지요. 그렇게 긴 편이 아니면서도, 영화가 레빈과 키티의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시간(그래 봤자 원작에 비하면 티끌이지만)을 투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이전 영화들에 비해 훨씬 커요. 게다가 이런 식의 트릭은 러시아어 소설을 각색한 영어영화의 어색함을 막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캐스팅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겁니다. 키라 나이틀리는 안나 카레니나 역으로 사람들이 첫 번째로 떠올릴 배우는 아니죠. 하지만 사람들이 안나 카레니나의 역으로 떠올렸고 실제로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들은 모두 톨스토이의 묘사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거야 브론스키도 마찬가지이고. 나이틀리가 최고의 안나 카레니나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나이틀리의 바짝 마르고 긴장한 안나 카레니나는 유의미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딱하긴 한데) 주드 로의 카레닌은 거의 완벽했고, 도널 글리슨과 알리시아 비칸더의 레빈/키티 콤비도 잘 어울렸습니다. 단지 아론 테일러-존슨(a.k.a. 킥애스)의 브론스키는 좀 가볍게 느껴졌는데, 그의 연기는 '우유부단한 햄릿'처럼 익숙한 전통을 따른 것이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좋은 장면들이 있습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첫 무도회는 그와 관련된 세 사람의 심리 묘사가 절묘하게 살아난 장면이었습니다. 전 마찬가지로 (영어로 번역되어 순수성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레빈과 키티의 글자 놀이 장면이 멋들어지게 재현된 것에 감탄했습니다. 단지 안나의 자살 장면은 너무 짧고 무미건조하더군요. 조금 더 공을 들였어도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전 라이트의 이 영화가 최고의 [안나 카레니나]라고 부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최고의 [안나 카레니나]라고 부를만한 영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극장용 장편영화의 형식을 유지하는 한, 톨스토이가 그린 장대한 러시아 사회의 묘사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는 나올 수 없을 거고요. 단지, 전 이 영화가 기존의 영화들이 비슷비슷한 각색 태도를 반복하는 동안 보여줄 수 없었던 것들을 비교적 많이 끄집어낸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13/03/16)

★★★

기타등등
당연히 미니 시리즈 각색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건 니콜라 파젯이 안나 카레니나로 나온 10부작 미니 시리즈더군요. 전 언제나처럼 러시아 버전이 더 궁금합니다.

감독: Joe Wright, 배우: Keira Knightley, Aaron Taylor-Johnson, Domhnall Gleeson, Alicia Vikander, Jude Law, Matthew Macfadyen, Kelly Macdonald, Olivia Williams, Ruth Wilson, Emily Watson

IMDb http://www.imdb.com/title/tt178176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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