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제왕의 첩 (2012)

2012.05.22 00:23

DJUNA 조회 수:21014


왕년에 밖에서 잠시 같이 놀았던 애인들이 궁에서 후궁과 내시로 만난다. 당연히 신상옥의 [내시]가 떠오를 법 하고, 실제로 여기저기서 알아보니 [내시]의 리메이크로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돕니다. 크레딧이나 보도자료에는 그런 정보가 전혀 없지만요. 이렇게 원작을 무시해도 되냐고요? 전 되는 거 같습니다. 리메이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리메이크라고 하더라도 김대승의 [후궁: 제왕의 첩]은 [내시]와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죠. 보면서 거의 신기하더라고요.

관계 정리. 화연과 권유는 애인 사이입니다. 하지만 화연은 왕의 후궁이 되어 궁으로 끌려가고, 같이 달아나려고 했던 권유는 화연의 아빠에게 거세당하죠. 그리고 그러는 동안 하필이면 왕의 이복동생인 성원대군도 화연을 좋아하고 있었답니다. 5년 뒤, 성원대군의 엄마인 대비는 왕을 독살하고 아들을 왕으로 만듭니다. 화연이 낳은 왕자는 아들의 왕위를 위협하는 유일한 장애물. 곧 피의 숙청이 벌어지고 화연은 어떻게든 이 와중에서 왕자와 함께 살아남아야 하는데, 새 왕은 아직도 화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고, 그동안 어디서 뭐하는지도 몰랐던 권유는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와 대비의 남자친구 겸 공범자인 신하의 손발 노릇을 하고 있지요.

이게 도대체 언제냐고요? 이 영화는 [내시]가 아닙니다. 왕이고, 대비고, 후궁이고, 몽땅 허구의 인물이에요. 심지어 이 영화의 배경이 조선이긴 한 건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세트나 의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아는 조선이 아니에요. 미술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조선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고.

김대승은 기자간담회에서 [후궁: 제왕의 첩]이 그리는 과거는 현재의 모습을 보다 은유적으로 돌아보기 위한 장치라고 하던데,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습니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사람들도 특별히 바뀐 거 같지 않고요. 하지만 그래도 군주제의 왕궁과 명목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세계는 다르죠. 욕망이 다르고 욕망을 구현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저에게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처럼 양식화된 판타지의 과거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꽤 유럽적인. 피에 굶주린 18세기 영국 극작가들이 동쪽 어딘가에 조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세계를 떠올려보세요. 딱 그 꼴입니다. 한국 무대 사극 이야기에 지하 감옥이 나온다면 여러분도 당연히 그런 게 아닐까 의심해보지 않겠습니까?

레이디 맥베스가 복사기로 자동 카피 되는 것 같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지극히 인공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궁중이라고 권력욕에 쩌는 여성들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캐릭터들은 옛날 조선 여성들보다는 그리스 비극 속 인물들 같습니다. 심지어 대사도 사극체보다는 서구 고전의 번역물을 흉내낸 것 같지요. 이런 말투는 중간중간 키치스러운 방향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옛날에 KBS 코미디언들이 [춘향전]의 속편인양 [피가로의 결혼] 번안물을 연기하는 걸 본 적 있는데, 그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죠.

차가운 영화입니다. [내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화연과 권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은 게 나올 법도 한데, 이 영화는 그런 데에 관심 없습니다. [후궁: 제왕의 첩]은 사랑보다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고, 욕망보다는 권력과 생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섹스 역시 광기의 표현이거나 음모의 일부입니다. 이러니 아무리 배우들이 벗고 또 벗어도 분위기가 (긍정적인 의미로) 달아오르는 일이 없죠.

제목이 [후궁: 제왕의 첩]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화연이 아닙니다. 심지어 화연이 '후궁'이라는 것도 전혀 안 중요하죠. 영화는 화연, 권유, 왕, 대비를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다룹니다. 아니, 대비와 왕의 비중이 더 크죠. 이 영화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장 확실하게 휘두르는 인물은 대비이고, 자신의 속내를 가장 많이 노출시키는 인물은 왕이니까요. 주인공인 것 같았던 화연과 권유는 속을 확실하게 읽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변수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들이 마침내 완전히 속을 드러내는 부분에서야 간신히 완성이 됩니다. 네, 많이 필름 느와르스럽습니다.

배우들 중 연기하면서 가장 신났을 것 같은 사람은 대비 역의 박지영입니다. 조금 다른 이유로 왕 역의 김동욱도 연기할 맛이 났을 것 같은데, 전 이 사람의 외모, 특히 눈 모양 때문에 종종 몰입이 힘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보니 이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종종 깨는 부분이 있었죠. 하지만 연기는 열심히 했고 결과도 좋은 편입니다. 조여정과 김민준에게는 이 사람들의 기존 이미지를 기대하시면 됩니다. 물론 조여정은 많이 벗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빠른 편입니다. 혼란스럽지만 지루한 구석은 없는 영화죠. 하지만 3시간이나 4시간은 필요한 이야기를 2시간 정도로 압축하다 보니 리듬감이 떨어집니다. 러닝타임 내내 속사포처럼 요약정리하는 영화죠. 몇몇 스토리를 가지치기해서라도 보다 여유를 갖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12/05/22) 

★★★

기타등등
1. 사극이면서 4대강을 까는 영화입니다. 지나가는 것처럼 슬쩍 언급하긴 합니다만. 

2. 조선시대에도 자동문이 있었군요. 아, 이 때는 조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요. 

감독: 김대승, 출연: 조여정, 김동욱, 김민준, 박지영, 박철민, 안석환, 이경영, 조은지,  다른 제목: Concubine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The_Emperor__s_Concubine.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9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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