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2012)

2012.03.03 18:21

DJUNA 조회 수:23273


[화차]는 미야베 미유키의 베스트셀러로,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실종된, 친척의 약혼녀를 추적하는 중년형사 이야기죠. 처음에는 단순실종으로 추정되었던 사건을 따라가다보니, 그 약혼녀라는 여자는 그 여자의 신분을 훔친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아마도 살인사건으로 추정되는 이 범죄 뒤에는 90년대 버블 경제의 붕괴 이후 일본인들이 겪었던 범사회적인 징후가 깔려 있었다는 거죠.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이건 영화하기 힘들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형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질긴 수사를 통해, 단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여자의 초상과 인생을 조금씩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처럼 영화로 옮기기 어려운 게 없죠. 일단 탐문수사라는 게 결코 영화적이지 않거든요. 사람들의 대갈치기로 일관하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대사들이 Q & A로 구성되니까요.

그래도 읽으면서 하나의 영화가 떠오르긴 했습니다. [로라]요. 오로지 몇 장의 사진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게 된 여자에게 집착하게 된 변태 아저씨의 로맨스인 거죠. [로라]도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이런 식의 영화가 못 만들어질 법도 없었죠. 형사 아저씨가 만나는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조금 더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각색을 조정한다면. 물론 변영주의 영화가 그런 작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소설 읽기 전에 이미 예고편을 봤거든요.

변영주의 각색을 거친 영화 [화차]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과 많이 다릅니다. 소설은 조용하고 침착하며 조금은 로맨틱하죠. 전형적인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분위기를 생각해보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변영주의 영화는 다혈질이고 성미 급하고 시끄러워요. 이것이 일본 소설의 한국식 각색이라는 거죠. 변영주는 시사회 이후 있었던 기자 간담회에서 원작 소설의 형사처럼 현명하고 차분한 모습의 한국 아저씨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답변을 했는데, 그걸 듣고 한참 웃었죠. 정말 대한민국에서는 아저씨들이 그런 식으로 나이를 먹기 힘들어요. 사회생활에서 살아남으려면 찌질해지는 건 필수.

구성 면에서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남자 주인공이 둘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원작에서 여자주인공의 약혼자는 초반에 사건을 의뢰했을 때만 잠시 나올 뿐, 그 이후로는 거의 나오지 않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 역할에 대응하는 동물병원 의사 문호는 그 뒤로도 계속 사건을 수사해요. 중반 이후로는 원작의 혼마 형사 역할로, 뇌물수수 때문에 경찰에서 쫓겨난 종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의 성격도 원작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러자 드라마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원작은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죠. 하지만 영화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여자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건에 대한 남자주인공의 태도도, 접근법도,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죠. 새로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열리는 겁니다.

하지만 원작과는 달리 자체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척 봐도 이 각색은 절충적이에요. 동물병원 원장만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면 좋겠지만, 그렇다면 전문적인 탐문수사가 어려우니 전직 형사가 나머지 일을 하는 거죠. 이러니 여자주인공 강선영에 대한 관점이 둘로 나뉘는데, 이는 해석을 늘려주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관점을 위축시키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건 '로맨스'로서 영화는 손상을 입습니다.

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당시의 일본과 IMF 이후 한국의 배경이 자연스럽게 전환을 이루는 걸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화차]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이겠죠. 미야베 미유키가 원작에서 말하려 했던 주제는 특별한 변환 없이 그대로 영화에 이식이 됩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이나 큰 장점은 이 탐문수사로 일관하는 이야기가 예상 외로 속도감이 좋고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들 김민희의 재발견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잘 하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김민희는 원래 이 정도 프로페셔널리즘은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습니다. (전 [뜨거운 것이 좋아] 이후부터 이 배우를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 배우에게 '명연기'를 시키려 작정한 장면들은 다 사족처럼 보입니다. '펜션' 장면과 '용산' 장면요. 특히 용산 장면은 여러 모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희생자 선정부터 상식에 어긋나 있지요. 진짜 큰 문제점은 불필요하고 별 의미도 없는 대사 때문에 지금까지 쌓아놓은 캐릭터가 거의 붕괴될 뻔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 이선균과 조성하 두 배우들이지만, 이들은 김민희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역할 분담 때문에 캐릭터가 평면화되고 감정이 단순화되기 때문이죠. 이선균의 역할이 늘어난 건 역시 클라이맥스의 '용산' 장면을 위해서인 것 같은데, 전 별 장점은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결론만 말한다면, [화차]는 재미있는 영화이고, 원작의 주제를 현대 한국 사회에 잘 반영하고 있으며, 배우들도 좋습니다. 하지만 절충적인 각색의 결과물은 미완성처럼 보이고, 종종 불필요한 곳에 힘이 들어가 있거나 휘청거립니다. 여전히 좋게 봤지만, 전 계속 같은 원작의 다른 영화를 꿈꾸게 되더군요. 원작을 끝내자마자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12/03/03) 

★★★

기타등등
예상하지 못했던 배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임지규, 양은용 같은 배우들이야 역 안 가리고 잘 나오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김별이 그 비중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감독: 변영주, 출연: 김민희 이선균, 조성하, 김별, 임지규, 양은용, 이희준, 차수연, 다른 제목: Helpless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Helpless.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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