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 기타 Johnny Guitar (1954)

2016.08.31 17:16

DJUNA 조회 수:4766


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는 익숙한 서부극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라한 서부 마을에 철도가 가로지를 예정입니다. 철도 주변엔 한탕을 노리는 투기꾼들이 몰려들고요. 당연히 토박이 마을 사람들과 투기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여기까지는 내용요약이라기보다는 장르설명입니다. 여기에 개성을 부여하는 건 캐릭터들입니다. 이 영화의 철도 투기꾼은 비엔나라는 여자로 자기 이름을 딴 살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무장도 안 하고 기타 하나만 짊어진 자니 기타라는 남자가 그 살롱에 도착하는데, 알고 봤더니 그는 비엔나와 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왕년의 총잡이입니다. 그리고 마을엔 오빠와 함께 은행을 운영하는 엠마라는 여자가 있는데, 엠마는 비엔나를 죽도록 싫어합니다. 비엔나에 따르면 엠마가 자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엠마는 댄싱 키드라는 남자를 좋아하고, 그 남자가 비엔나를 좋아한다고 믿습니다. 댄싱 키드를 얻을 수 없으니 그를 증오하고 그와 함께 비엔나도 증오하는 거죠. 그런데 오빠가 노상강도에게 살해당하고 댄싱 키드가 용의자 선상에 올랐습니다. 이 순간부터 엠마의 증오는 사적인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자경단을 조직하고 용의자를 린치할 수 있게 된 거죠.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얼마나 믿으세요? 전 엠마에 대한 비엔나의 설명 같은 건 하나도 못 믿겠습니다. 일단 그 긴 대사는 살롱 마담이 읊을만한 내용이 아니에요. 화자가 뉴욕의 정신분석의이거나 프로이트를 좀 읽은 50년대 인텔리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아니잖아요. 비엔나의 설명이 사실이라는 법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엠마가 실제로 사랑하는 대상은 댄싱 키드가 아니라 비엔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엠마가 이 영화 전체를 통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비엔나 뿐이에요. 댄싱 키드와 엠마가 함께 있는 장면에서도 별다른 감정 따위는 느껴지지 않지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요. 물론 댄싱 키드가 비엔나를 좋아하고 있느냐도 또 다른 문제인데... 영화는 여기에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서부극이라기보다는 서부극을 연기하는 다른 무언가 같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빠듯한 조건 속에서 흔한 클리셰들을 모아 고도로 세련된 서부극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제작비 때문인지, 원작 때문인지, 각색 때문인지, 감독 때문인지 아니면 배우들 사이의 갈등 때문인지, 그렇게 치밀하지 못하고 가끔 아귀도 맞지 않으며 한마디로 좀 괴상합니다. 종종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좀 웃고 싶은데, 정작 그 개별장면들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고 영화적 긴장감으로 가득한 거죠. 파편화된 조각들을 다 합하면 그 합보다 큰 뭔가가 만들어지는데 그게 뭔지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없다고 할까요. 조각들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는 게 더 쉽긴 한데, 그것도 말로만 하면 종종 이상해집니다. 후반에 나오는 비엔나의 피아노 콘서트 같은 걸 도대체 어떻게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키치라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물론 분명한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 있습니다. 엠마의 자경단이 매카시즘에 대한 은유임이 거의 확실해요. 일단 필립 요단의 이름 밑에서 이 영화를 각색한 작가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벤 매도우니까요. 1950년대의 미국이라면 영화가 그리는 린치가 은유로서만 존재하는 안전한 무언가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미는 명확하죠. 할리우드의 여성묘사와 동성애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엔나와 엠마의 관계를 넘기고 지나칠 수가 없겠지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두 여자의 총격전으로 끝나는 서부영화가 얼마나 되겠어요. 남자 이름을 제목으로 쓰고 있는 영화지만 이 영화의 남자들은 모두 참 하찮습니다. 처음엔 그럴싸해보였던 사람들도 끝에 갈수록 점점 초라해지지요. 자니 기타도 크게 다를 게 없고.

악명 높은 제작 과정으로 유명한 영화입니다. 엠마 역의 머시디스 매컴브리지는 비엔나 역의 조운 크로포드를 싫어했고 조운 크로포드 역시 매컴브리지를 극도로 질투했다고 하죠. 자니 기타 역의 스털링 헤이든도 조운 크로포드와 만날 싸웠다고 하고. 매컴브리지와 크로포드 모두 당시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다고 하고요. 그래도 조운 크로포드가 이처럼 빛이 났던 영화도 많지 않고 매컴브리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를 빼면 이상하겠지요. 결국 세월이 흐르면 고생은 사라지고 결과물만 남는 겁니다. [자니 기타]의 경우엔 그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거고. (16/08/31)

★★★★

기타등등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 영화를 1.66:1 비율로 튼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감독: Nicholas Ray, 배우: Joan Crawford, Mercedes McCambridge, Sterling Hayden, Scott Brady, Ward Bond, Ben Cooper, Ernest Borgnine, John Carradine, Royal Dano

IMDb http://www.imdb.com/title/tt004713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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