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영어 제목을 달고 있고 크레디트는 불어로 나오지만 일본에서 일본배우들을 데리고 찍은 일본 영화입니다. 키아로스타미의 전작인 [사랑을 카피하다]가 프랑스와 영국 배우들을 데리고 이탈리아에서 찍은 유럽 영화이니, 이번 영화의 프로젝트가 [사랑을 카피하다] 이후에 나왔다고 추측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키아로스타미의 말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는 예상 외로 오래되었다고 해요. 그는 1990년대 말에 도쿄에 갔다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노변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 뒤로 도쿄에 갈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가 주변에 있는지 찾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게 영화 아이디어로 발전한 것이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바벨]에서 그랬던 것처럼,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도 하나의 장르로서 일본 영화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사건들은 키아로스타미의 이란 영화와는 달리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접한 재료들을 꼼꼼하게 연구해서 모방하고 재조립한 것입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종종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우쭐해하며 과시하기도 합니다. 두 주인공들이 일본의 서양화가 야자키 치요지의 [교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그리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관계의 두 사람 이야기입니다. 여자주인공 아키코는 아르바이트로 콜걸 일을 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아키코가 새로 소개받은 고객은 은퇴한 대학교수인 타카시입니다. 아키코는 타카시의 집에서 밤을 보내지만 둘이 같이 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전 안 잤다고 생각합니다만. 아키코에 대한 타카시의 감정이나 동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이 상황은 은근히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모 소설을 떠올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고독이나 소통의 어려움에 대한 일상적인 주제로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영화를 장르 영화로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아트 하우스 어법을 취해 만든 스릴러 영화이며 심지어 조금은 호러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이 당황했던 결말도 이 영화의 장르를 호러로 놓으면 자연스럽죠.) 아마 지금까지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히치콕에 가까운 작품일 거예요. 장르도 그렇고 주제도 그렇습니다.

익숙한 아트하우스 영화의 태도와 스타일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죄로 분류될 수 있는 일을 저지른 평범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키코와 타카시죠. 그리고 이들 주변에는 자성의 능력은 티끌만큼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비행은 용납할 수 없는 사람, 그러니까 아키코의 남자친구인 노리아키가 있습니다. 아키코를 데려다주러 차를 끌고 나온 타카시는 노리아키와 마주치게 되고, 두 사람은 노리아키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지며 탄로될 위험은 점점 커져요. 이런 상황이 영화 끝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만 전 이 영화를 이란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리아키를 특정 위치에 적절하게 배치하면 썩 그럴싸한 이야기가 나오죠.

아까 저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인물들과 상황이 일본 영화와 소설에서 2차적으로 얻은 것이라고 했는데,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겹쳐지는 상황에서 역할극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인 키아로스타미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단지 일본이라는 배경과 스릴러의 요소가 더해지면서 키아로스타미의 어법은 이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얻습니다. 이미 익숙한 것 같기도 한 키아로스타미의 롱테이크도 스릴러 틀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아요. 아키코의 캐릭터가 소개되는 초반의 술집 장면처럼 장면 대 장면 분석 욕구를 자극하는 부분도 많고요. 자애롭고 고풍스러운 동양의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했던 영감님이 이 영화에서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이전에 썼던 도구들을 흉기처럼 휘두르며 주인공들을 고문하고 끔찍한 파국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재미있는 것 보여주랴?”하는 투로 과시적인 테크닉을 펼쳐 보이기도 하죠.

이전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태도라 당황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전 이게 이란 영화의 익숙한 틀을 거의 창시했다고 볼 수 있는 늙은 거장 역시 그 틀 안에 불편하게 감금되어 있었고 지금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예술적 자유를 느끼는 증거로 보겠습니다. 앞으로 그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그런 자유를 오래오래 누리길 빕니다. (13/11/02)

★★★☆

기타등등
그런데 진화론을 창시한 학자 이름이 뭐냐는 시험문제를 보고 다윈 대신 뒤르켐을 떠올리는 대학생이 몇이나 될까요?


감독: Abbas Kiarostami, 배우: Tadashi Okuno, Rin Takanashi, Ryo Kase, Denden, Reiko Mori, Kaneko Kubota

IMDb http://www.imdb.com/title/tt184328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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