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2013)

2013.11.22 00:32

DJUNA 조회 수:9890


천재 과학자 우석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더 운이 좋은 건 실험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도 알아냈다는 거죠. 그는 러시아 대기업의 소유로 있는 마샬 제도의 섬 주변에 중력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소유주를 설득해서 심해에 시간여행 실험실을 세웁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 연구 결과를 내놓지 못하자, 러시아 측 인원들은 모두 철수하고 우석과 한국인 동료들도 쫓겨날 위기에 처하죠. 우석은 실험을 강행하기로 하고 동료인 영은과 함께 타임머신 트로츠키호에 오릅니다. 목적지는 24시간 뒤의 미래. 그것도 단 15분밖에 머물 수 없죠. 그게 트로츠키가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이라는데, 왜 그 시간이 인간들 시계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24시간과 15분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미래로 간 그들이 발견한 건 폭발사고로 폐허가 된 기지. 다시 현재로 돌아온 그들이 가져온 CCTV 파일 속에는 연구원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들이 찍혀있습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광식이 동생 광태]와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감독인 김현석의 신작 내용이라니 당황스럽죠. 아니나 다를까, 그의 원작 각본은 아닙니다. 그가 각색 작업에 참여하긴 했지만 각본의 원작자는 이승환이에요. 김현석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볼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에 도전한 모양인데, 결과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습니다. 김현석 같은 장르 문외한이 낯선 상황 속에서 허둥거리다가 삐끗하는 게 훤히 보이는 영화예요.

[열한시]의 설정은 지나칠 정도로 흔해서 거의 기성품 게임과 같습니다. 주인공이 가까운 미래나 가까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데, 그 짧은 여행이 온갖 종류의 부작용을 일으키고, 주인공은 그걸 해결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꼼꼼하게 연구되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없이 진부해지는 영역이죠. 이런 이야기는 두 종류로 나뉩니다. 주인공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열한시]의 각본은 후자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좀 무리한 게임 같습니다. 이런 설정은 [열한시]와 같이 짧은 시간 여행일수록 문제가 더 크거든요. 하긴 멀리 가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짧은 여행일수록 티가 더 많이 납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여행자가 미래의 재난에 대한 정보를 갖고 왔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길은 무한대입니다. 거기에 있는 대로 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영화는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그런 재난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고 있는데, 고전적인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척 봐도 너무 대충이에요. 예를 들어 이들이 복구한 파일 안에는 특정 연구원이 위험한 이상행동을 하는 장면이 찍혀 있습니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연히 그 사람을 격리시켜야죠. 하지만 그들은 멍하니 그를 방치하고 아무 일도 안 합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온갖 정보와 방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영은은요) 이들은 아무 것도 안하고 뒤늦게 일이 닥치면 놀랄 뿐입니다. 그렇게 바보 같이 굴기도 힘들 텐데 영화 끝까지 그래요.

영화는 소위 한국적 SF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거치는 실수를 그대로 밟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걸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것이죠. 특히 엔지니어 영식 역할의 박철민(그는 [7광구]에서도 거의 비슷한 연기를 했는데)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도가 지나칠 정도죠.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인'이 되려면 엉뚱한 타이밍에 눈치 없는 농담이나 해대고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이 되어야 하며 직업과 맞지 않게 무능하고 무식해야 하나 봅니다. 아, 그리고 전 3년이나 연구소에서 일했다는 연구원들이 연구소가 왜 해저에 있는지를 서로에게 설명하는 장면을 보고 기가 찼답니다. 당연히 관객들을 위해서지만, 그건 설정을 설명하는 최악의 방법이에요. 조금이라도 장르에 대해 알았다면 이런 짓은 안 하죠. (하긴 아무리 뻘짓을 해도 [7광구]의 차예련이 광합성생태계와 화학합성생태계를 설명하는 장면을 능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영화에서 가장 힘이 들어간 건 SF적 설정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들의 사연과 관련된 신파입니다. 우석은 죽은 아내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 있고, 영은은 시간여행을 연구하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있고, 다른 사람들도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눈앞에서 진행되는 액션을 능가해버려요. 기본 액션이 끝나고 이들의 이야기와 관련된 장황한 에필로그가 나올 때에는 감독이 이 영화 작업을 싫어했을 거라는 강한 확신까지 듭니다.

그래도 [7광구]보다는 조금 나은 영화입니다. 주인공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멍청하고 게으르지만 엉성하게나마 아귀가 맞는 이야기를 만들긴 했어요. 하지만 어딜 봐도 김현식의 장점은 안 보이는군요. 오히려 다른 영화에서는 장점 때문에 감추어져 있던 그의 단점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화입니다.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준비가 한참 부족했어요. (13/11/22)

★★

기타등등
영화의 기독교적 요소는 신경 쓰입니다. 일단 종교와 관련 없는 내용의 SF를 시작하면서 성경을 인용하면 의심받기 딱 좋죠. 초반에 잠시 등장하는 십자가는 더 신경 쓰입니다. 영화는 "불교 신자에게 왜 십자가를 주냐"식의 농담으로 이를 가볍게 넘기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 십자가가 스토리 안에서 종교적, 아니, 미신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거든요. 처음부터 종교 이야기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종교적 요소는 될 수 있는 한 넣지 않는 게 좋아요.


감독: 김현석, 배우: 정재영, 김옥빈, 최다니엘, 이대연, 박철민, 신다은, 이건주, 다른 제목: 11 A.M.

IMDb http://www.imdb.com/title/tt328139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detail.nhn?code=85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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