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터지스의 마지막 영화인 [독수리 착륙하다]가 왓챠에 들어왔어요. 이 영화의 원작은 잭 히긴스의 동명소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원에서 번역서가 나온 적 있어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지금은 동서 미스터리 북스에서 [독수리는 날개치며 내렸다]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더군요. 이전 동서추리문고에선 리스트에 없었던 책인데.

굉장히 인상적인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무솔리니 구출작전으로 영감을 얻은 아돌프 히틀러는 윈스턴 처칠을 납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부하들은 대충 수습하려고 하는데, 처칠이 최소한의 경호 인력과 어느 시골 마을에 내려온다는 첩보가 날아듭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계획이 진행되고 쿠르트 슈타이너라는 공수부대장과 베를린 대학에 있던 전직 IRA 요원 리암 데블린이 이 작전에 투입됩니다.

그러니까 영국인이 쓴 적군 주인공의 모험담이에요. 우리에겐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적군의 영웅화는 전통이 깊죠. 로마 사람들은 한니발과 부디카 여왕을 영웅시했고 영국인은 그레이스 오말리를 영웅시했고. 적군이 위엄있는 존재여야 그에 맞선 전쟁도 더 가치가 있어지니까요.

히긴즈의 이야기에서는 이 아이러니컬한 설정을 최대한 낭만화하고 있어요. 솔직히 여기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대한 페티시즘적인 매혹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슈타이너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올바른 남자로, 뜬금없이 유대인 여자아이를 구출하려다 체포된 경력도 있죠. 밀덕들이 좋아하는 '멋진 독일군'의 근사한 면만 그럴싸하게 모아놓은 인물이에요. 그에 비하면 리암 데블린은 보다 자유분방하고 어처구니 없는 인물로 슈타이너의 엄격함과 캐릭터 면에서 대비를 이룹니다. 둘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 로맨티스트이고 그 때문에 불가능하고 어처구니 없는 모험에 끌리죠.

소설과 비교하면 영화는 아무래도 손해를 좀 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액션 자체가 아니거든요. 이 영화의 액션은 엄청나게 스릴 넘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치밀한 계획도 없고 중간엔 일반인을 잡은 인질극이 되지요. 액션만 보면 좀 정체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이를 캐릭터 묘사와 로맨스로 채우고 있는데, 아무래도 영화는 시간이 모자라서 이 부분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캐릭터가 숨쉴 여유가 부족합니다.

그래도 쓸데없는 잔재주 없이 정공법으로 치고 가는 70년대식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마이클 케인을 독일군 장교로 캐스팅하다니 말이 되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케인이 여기서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요. (20/01/24)

★★★

기타등등
척 봐도 단발성으로 끝나야 할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히긴즈는 이 책의 속편을 썼습니다. 안 읽었지만 전 좀 흥이 깨지는 거 같습니다. 자기 주인공들을 지나치게 좋아했던 거 같아요. 속편 말고도 데블린이 주인공인 소설이 몇 편 더 나왔는데 그 중 [악마의 손길]을 읽었죠. 집에 책이 있는데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감독: John Sturges, 배우: Michael Caine, Donald Sutherland, Robert Duvall, Jenny Agutter, Donald Pleasence, Anthony Quayle, Jean Marsh, Sven-Bertil Taube, Judy Geeson, Siegfried Rauch, John Standing, Treat Williams, Larry Hagman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74452/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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