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모란: 인협의 길]이 시작되면, 오류는 마을 축제에서 북치며 놀고 있습니다. 저번 영화에서 드디어 야노 집안의 보스로 인정받지 않았냐고요? 네, 하지만 그 뒤로 수련을 쌓겠다고 여행을 떠났죠. 이게 이치에 맞는 변명처럼 들리나요? 아버지 복수한다며 5년 동안 떠도는 동안 수련은 충분히 쌓지 않았던가요? 이제 슬슬 고향으로 돌아가 인력을 모으고 영향력과 리더쉽을 다질 때가 아닌가요?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상식적인 논리보다 시리즈 영화의 논리가 더 중요한 모양입니다.


이미 오류는 야쿠자들 세계에서는 유명인사입니다. 그냥 유명한 게 아니라 거의 순회공연하는 아이돌 취급을 받더군요. 팬들도 많고요. 그 중 가장 요란한 팬은 1편에서 의형제가 된 쿠마토라지만요. 그가 나오는 코믹한 간막극이 이 영화에서도 꽤 길게 나옵니다. 그렇게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요.


영화의 무대가 되는 곳은 비단으로 유명한 토미오카입니다. 오류가 머무는 야쿠자 집안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운송업을 하며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 이 동네 민심은 최악인데,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고리대금업자 때문이죠. 견디다 못한 야쿠자 보스는 이들을 위해 관청을 급습해서 서류를 태울 계획을 세우는데, 아뿔사, 경쟁자 야쿠자와 고리대금업자가 이미 거기 함정을 파두었던 거죠. 결국 보스는 경찰과 싸우다 죽고 맙니다. 그 틈에 경쟁자 야쿠자 보스는 새로 세운 비단 공장에 빚을 진 마을 사람들을 몰아 넣고 싼 값에 부려먹으면서, 운송업까지도 독점할 계획을 세웁니다. 전통을 고수하는 착한 야쿠자와 서구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나쁜 야쿠자의 대립은 메이지 시절을 무대로 한 야쿠자 영화의 단골 소재라고 하더군요. 이 시리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오류가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전편 [여자 야쿠자] 때보다 훨씬 성숙해졌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언변에는 논리가 서 있고 태도에는 위엄이 있으며 성질 뻗친다고 칼부터 찾는 일도 없습니다. 오류가 맨 처음에 하는 일도 야쿠자 보스들의 모임을 찾아 그들의 의리와 윤리에 호소하는 것이죠. 어둠 속에서 사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일수록 내부의 윤리가 중요하다는 오류의 논리는 저에게 조금 오싹하게 들리지만, 사실 철저하게 이치에 맞으며 설득력도 강합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착착 풀리면 좋겠지만, 물론 정말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별별 변수들이 다 튀어나오지요. 제 생각에 가장 지독한 장애는 죽은 두목의 딸과 결혼을 약속한 유키치인 거 같습니다. 멍청하고 성미가 급하면서 의리에 목을 맸죠. 영화 중반 이후에 오류가 하는 일은 대부분 유치키가 저지른 사고의 뒷수습입니다. 그 동안 온갖 나쁜 일이 일어나죠. 그 중 정점은 두목의 딸이 나쁜 보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고.


어깨에 새긴 붉은 모란 문신까지 보여주며, 오류가 두목의 딸을 위로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입니다. 그 감정이 정말 절절해서, 전 한동안 오류 역시 그 여자와 같은 일을 겪었던 게 아니었나 추측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사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오류 역의 후지 준코(후지 스미코)는 도에이 프로듀서의 딸, 다시 말해 낙하산 공주님이었기 때문에 건드릴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나요. [붉은 모란] 시리즈가 비슷한 핑키 바이올런스 영화들과 차이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전 이게 누구에게도  손해였던 것 같지 않습니다.


하여간 이 장면을 보면 오류가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진보적인 캐릭터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당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가하는 도덕적 굴레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여전히 여자의 행복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하는 것이라는 환상에 갇혀 있죠.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여성성'을 버린다는 아이디어 역시 여기서 나온 거 같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그 '결여'을 겪지 않도록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아마 자기를 사기 도박으로 몰고 갈 뻔했던 여자도박사 렌에게 그처럼 관대했던 것도 렌과 렌의 남편 사이의 절절한 관계를 보았기 때문이 아닌지.


결국 오류의 인내는 한계선을 넘고, 한판 승부가 벌어집니다. 요새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오류의 액션은 조금 갑갑합니다. 기모노가 하반신의 움직임을 막고 몇몇 육체적 액션은 힘겨워하는 티가 나요. 하지만 종종 사용하는 유도 동작은 자신보다 공격하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기본 논리는 맞고, 다들 칼만 들고 설치는 자리에서 연발권총까지 들고 나오니 그 이점도 상당하죠. 게다가 늘 들고 다니는 단도를 휘두르는 폼이 상당히 멋있어요. 전 오류를 생각하면 늘 한 손으로 칼집을 잡고 입으로 끈을 푸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전 그걸 "내 인내는 여기서 끝이란다"라는 의미로 읽죠.


나쁜 야쿠자들은 모두 죽지만, 그들이 남긴 상처는 돌이킬 수 없고, 세월 역시 돌이킬 수도 없는 일. 영화의 결말은 상당히 컴컴합니다. 오류가 처음 장면이 나왔던 자리에서 북을 치며 끝내는 수미쌍관의 구조는 두 장면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더 효과적입니다. (11/07/30)


★★★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 오류의 상대로 나오는 배우는 츠루타 코지. 저번 타카쿠라 켄이 맡았던 역과 비슷해요. 어쩌다 오류를 만나 돕게 되는 떠돌이 무사. 하지만 배우 이미지 때문에 둘의 관계가 조금 달라보입니다. 성적 긴장감은 조금 줄었지만 두 성인이 보다 성숙한 관계를 맺는다는 느낌이 든달까.

 

감독: Norifumi Suzuki, 배우: Sumiko Fuji, Koji Tsuruta, Bunta Sugawara, Yuki Jono, Tomisaburo Wakayama, 다른 제목: Red Peony Gambler pt.2 : Gamblers Obligation


IMDb http://www.imdb.com/title/tt0063065/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643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