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익스프레스 Berlin Express (1948)

2010.09.06 21:29

DJUNA 조회 수:10174


[베를린 익스프레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찍은 최초의 할리우드 극영화입니다. 스토리가 먼저였는지, "전후 독일의 끝내주는 폐허를 배경으로 영화를 하나 찍자!"라는 계획이 먼저였는지, 저는 몰라요. 후자였다고 해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어요. 곧 사라질 드문 기회가 있다면 활용을 해야지요.


파리의 하늘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저격 당하고 아이들이 그 시체를 묻어주려다가 다리에 묶인 암호를 발견한다는 내용의 인상적인 도입부를 넘어서면, 영화의 시작부분은 다소 메마르고 밋밋한 편입니다. 얼핏 보면 홍보용 다큐멘터리 같죠. 파리발 베를린 행 열차에 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소련측 승객들이 소개되는 부분은 너무 인공적이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캐릭터와 상황을 설명하는 나레이션은 너무 많아서 조금 지겹고요. 열차 안에서 지뢰가 터져 베른하르트라는 독일인 요인이 살해당한 뒤에도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인 용의자가 된 그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내리면 압도적인 광경이 관객들을 맞습니다. 연합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 대도시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근사한 필름 느와르의 세트입니다. 살해당한 줄 알았던 베른하르트가 알고 보니 가짜였고 진짜 베른하르트가 다른 승객이었다는 걸 밝혀지는 부분은 그리 놀랍지 않고, 그가 다시 나찌 잔당들에게 납치되고 그의 프랑스인 비서 루시엔이 다른 승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도 역시 징그러울 정도로 인공적이지만, 그래도 그 후로 영화는 느낌이 다릅니다. 훌륭한 세트가 주어지니까 영화는 그냥 흘러가는 거 같아요.


이후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특별히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베른하르트를 쫓는 모험담은 그냥 일반적인 전쟁 홍보물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아요. 악당들은 평면적이고 그들의 음모는 불분명하며 선과 악의 대결은 다소 심심하게 마무리지어집니다. 하지만 실제 프랑크푸르트의 폐허는 이 뻔한 이야기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고, 자크 투르뇌는 그 폐허를 환상적인 흑백 화면으로 묘사합니다. 클라이맥스 액션이 펼쳐지는 양조장 장면 같은 건, 보여지는 이미지가 워낙 근사해서 이야기의 빈약함이 쉽게 잊혀지죠. 영화 상당 부분이 그렇습니다. 


위에서 계속 반복해가며 뻔하다고는 했지만, 이 영화의 정치적 메시지는 은근히 오래 남습니다. 네, 조금 교과서적이긴 해요. 같은 열차에 탄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소련인이 힘을 합쳐 나찌와 싸워온 선량한 독일인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의 메시지가 뭐겠습니까. 하지만 과거의 낙천주의와 이상주의는 오히려 더 애잔하고 강렬한 법. 그 뒤 몇십 년 동안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지 알고 있는 우리에겐 이 순진무구한 모험담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특히 미국인과 소련인 주인공이 앞으로 다가올 냉전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도 화해와 소통의 기회를 잡으려 하는 부분은 말이죠. (10/09/06)



기타등등

멀 오베론은 이 영화를 찍는 동안 촬영감독 루시엔 발라드랑 결혼했다고 하더군요.


감독: Jacques Tourneur, 출연: Merle Oberon, Robert Ryan, Charles Korvin, Paul Lukas, Robert Coote, Reinhold Schünzel, Roman Toporow, Peter von Zerneck


IMDb http://www.imdb.com/title/tt004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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