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들렌 올넥의 [에밀리 디킨슨의 밤]은 SNL 코미디처럼 보이는 영화입니다. 몰리 섀년이 에밀리 디킨슨을 연기해서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스타일이 그래요. 그러니까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이미지를 일부러 뒤집고 조롱하는 놀려대는 꽁트들 있지 않습니까. 영화는 이 꽁트들을 대놓고 따라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반전이 있습니다. 올넥은 디킨슨을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지를 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존의 디킨슨의 이미지를 갖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들은 모두 다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코미디는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영화는 메이블 토드의 강연을 액자로 삼아 전개됩니다. 토드는 에밀리 디킨슨 사후에 시를 편집한 사람이죠. 에밀리의 오빠 오스틴의 정부이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메이블 토드는 그 뒤 1세기 넘게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고정관념의 이미지를 소개합니다. 그 다음에 몰리 섀넌이 에밀리 디킨슨으로 나오는 과거 장면들이 등장해 당시 실제 있었을 것 같은 장면들을 재현합니다. 이 장면들은 의도적인 코미디지만 토드가 만들어낸 조작된 이미지보다 실제 인물과 일어난 사건에 가깝지요.

다양한 미신들이 파괴됩니다. 에밀리는 생전에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의 시를 출판하려 했다는 것, 은둔자였을 수는 있어도 결코 수줍거나 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 물론 영화는 에밀리 디킨슨과 수잔 길버트의 관계를 대놓고 성적인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이기도 했지요. 은폐된 퀴어 역사를 전면으로 끄집어내는 것요. 영화 끝에 가면 에밀리 디킨슨의 원고에서 메이블 토드가 지워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잔 길버트의 이름을 첨단 과학으로 복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면 찡합니다. 사실 영화는 많은 부분이 찡해요. 아무리 밝게 코미디를 하더라도 이성애 정상 사회 속에서 은폐되고 묻히고 죽어간 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둡고 분노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지요.

[조용한 열정]과 같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밤]은 품위있는 무언가를 의도한 작품이 아니에요. 톤도 매 장면마다 오락가락하고 농담의 결과물은 종종 유치찬란해집니다. 하지만 영화에는 발견의 기쁨과 왜곡된 역사에 대한 분노가 모두 담겨 있고 그 감정은 영화에 있는 그대로 반영됩니다. (19/09/16)

★★★

기타등등
곧 헤일리 스타인펠드가 에밀리 디킨슨으로 나오는 [에밀리]라는 시트콤이 나온다나봐요. 아마 그 분위기는 [조용한 열정]보다는 이 영화에 더 가까울 거 같습니다.


감독: Madeleine Olnek, 배우: Molly Shannon, Amy Seimetz, Susan Ziegler, Brett Gelman, Jackie Monahan, Kevin Seal, Dana Melanie, Joel Michaely, Sasha Frolova

IMDb https://www.imdb.com/title/tt5176580/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5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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