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피센트 Maleficent (2014)

2014.06.03 10:06

DJUNA 조회 수:14540


디즈니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악당 말레피센트에겐 동기가 없습니다. 공주의 명명식에 초대받지 않았다니 기분이 상한 건 알겠는데, 그것만으로 16년에 걸친 분노와 악행을 설명할 수는 없죠. 일단 귀찮지 않습니까. 그러니 누군가가 말레피센트에게 보다 그럴싸한 동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짜내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린다 울버튼이 쓴 [말레피센트]의 각본은 당연히 페미니스트 관점을 택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인어공주] 이후 디즈니 각본은 늘 페미니스트 관점을 염두에 두어 왔죠. 그 고려가 결과에 언제나 반영된 것은 아닙니다만. 하여간 울버튼의 각본은 그런 면에서 오히려 정통적입니다.

영화는 말레피센트와 오로라 공주의 아버지 스테판 왕이 오랜 친구 사이였다고 이야기를 풉니다. 스테판이 사는 인간 왕국은 말레피센트가 사는 요정 나라를 늘 탐내고 있었는데, 그 나라의 왕이 요정 나라를 침략하려다 패배하고 세상을 뜨게 되자, 왕이 될 야심을 품은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잘라 죽어가는 왕에게 바치고 공주와 결혼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화가 날 만 하죠. 이해가 됩니다.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이건 거의 상징화된 성폭행이 아닙니까. 정말로 스테판이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자르는 장면은 데이트 강간처럼 그려집니다.

동기가 주어졌지만 영화는 여전히 말레피센트를 악으로 몰지 않습니다. '잔혹동화'와는 거리가 멀죠. 복수를 위해 세 요정이 키우는 오로라 공주를 지켜보던 말레피센트는 요정의 바보 짓 때문에 아기가 계속 위험에 처하자 오히려 비밀리에 아이를 돌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오로라는 말레피센트를 자신의 요정대모라고 믿어버리죠. 여기서 둘의 친근한 관계가 성립되고 말레피센트는 갈등하게 됩니다.

단지 이렇게 이야기를 풀다 보니 영화의 설정이 더 이상해집니다. 다들 조금씩 임시방편처럼 보여요. 예를 들어 요정 나라와 인간 왕국이 그렇게 사이가 안 좋다면 오로라 공주를 돌보는 세 요정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말레피센트의 저주가 처음부터 공주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잠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설정도 원작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좀 김이 빠져 보입니다. 물론 전 원작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세 요정을 방해만 되는 바보천치로 만든 것에 조금 실망했습니다만 이것까지 뭐랄 수는 없는 것이고... 전체적으로 영화는 기대보다 싱겁고 무난하며 그러면서도 난장판입니다.

영화의 시각적 인상은 평범합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쪼끄만 스턴트맨들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괴물에게 달려드는 장면 같은 건 이제 지루합니다. 요정 나라의 묘사에도 특별한 상상력은 발견되지 않고요. 세 요정의 컴퓨터 그래픽은 언캐니 밸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셀 애니메이션이었던 원작이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과 비교하면 더욱 실망스럽죠. 그나마 인상적이었던 건 릭 베이커가 말레피센트 역의 안젤리나 졸리에게 심어준 가짜 광대뼈 정도.

어느 기준으로 보아도 성공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리나 졸리의 말레피센트는 인상적인 캐릭터이고 말레피센트와 오로라의 관계 묘사에는 심술궂은 연애 영화와 같은 매력이 있습니다. 전 결말도 좋았고요. 단지 이 이야기를 제대로 그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장황한 프롤로그와 같았던 동화적 접근법을 포기하고 조금 더 진지한 화법을 모색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4/06/03)

★★☆

기타등등
원작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영화에서도 필립 왕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나오는 이유는 순전히 '진실한 사랑의 키스'라는 클리셰를 놀려먹기 위해서죠. 디즈니 영화에서 이 클리셰가 얻어 맞은 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입니다. [마법에 걸린 사랑]과 [겨울왕국]이 먼저였죠. [겨울왕국]에선 키스까지는 아니었지만.


감독: Robert Stromberg, 출연: Angelina Jolie, Elle Fanning, Sharlto Copley, Lesley Manville, Imelda Staunton, Juno Temple, Sam Riley, Brenton Thwaites, Kenneth Cranham, Isobelle Molloy, Michael Higgins, Vivienne Jolie-Pitt, Eleanor Worthington-Cox, Janet McTeer

IMDb http://www.imdb.com/title/tt158731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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