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어페어 En kongelig affære (2012)

2012.12.24 01:11

DJUNA 조회 수:12552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 7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직 17살 소년이었던 1766년에 왕위에 올랐던 그는 정신질환자였습니다. 그는 왕이 된 해에 영국의 왕 조지 3세의 누이였던 캐롤라인 마틸다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는데, 당시 캐롤라인 마틸다는 덴마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왕의 상태에 대해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 때 당시 왕비의 나이는 15살.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아내를 온갖 방식으로 구박하던 1768년, 크리스티안 7세는 갑자기 유럽 여행을 떠납니다. 돌아왔을 때 그는 요한 프리드리히 슈트루엔제라는 독일인 의사를 왕실 주치의로 데리고 있었습니다. 슈트루엔제는 당시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으로, 왕의 총애를 이용해 덴마크에서 엄청난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버려지다시피했던 캐롤라인 마틸다 왕비와 사랑에 빠졌죠.

덴마크 사람들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이나 장희빈 이야기를 아는 것처럼요. 물론 그들은 이야기의 결말도 알고 있습니다. IMDb로 '슈트루엔제'를 검색해보니 이 영화 [로얄 어페어]를 포함해서 네 편의 영화가 걸리던데, 분명 더 많을 겁니다. 소설도 많을 거고요. [로얄 어페어]는 다룬 보딜 스텐센-레트의 [Prinsesse af blodet]라는 소설이 원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사건을 다룬 페르 올로프 엔크비스트의 [가면의 시대]라는 소설이 나와 있습니다. 

영화는 왕비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폐위되어 독일의 첼레 성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캐롤라인 마틸다가 아들인 프레데릭 왕자와 루이자 오거스타 공주에게 편지를 쓴다는 형식이죠. 물론 영화는 편리하게 왕비를 떠나 슈트루엔제의 관점을 따라가기도 하고, 가끔은 그들의 정적인 율리안네 마리 대비나 굴베르 수상의 이야기를 엿듣기도 합니다. 

제목이 [로얄 어페어]라니, 바람 피우는 왕비를 그린 화끈한 연애영화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호사스러운 로맨스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가 보기에, 왕비와 슈트루엔제의 관계에서 섹스와 로맨스는 일종의 부록으로, 그들은 같은 정치활동을 하는 동지에 더 가까웠습니다. 실제 캐롤라인 마틸다와 슈트루엔제는 더 그랬을 것 같아요. 영화는 근육질 배우 마즈 미켈센을 슈트루엔제로 캐스팅해서 섹스 어필의 비중을 늘렸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가 심심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엔 섹스 말고도 사람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얼마든지 있지요.

[로열 어페어]는 실패한 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 심지어 프랑스 혁명 자체도 도달한 적 없던 목표를 달성했지만, 시대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그리고 당사자들에게 정치적 능력과 인식이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에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던 짧은 개혁의 이야기요. 이야기를 다 아는 덴마크 사람들도 갑갑했겠지만, 덴마크 역사를 모르는 다른 관객들도 갑갑하긴 마찬가지겠죠. 이미 결론을 알려주고 시작하는 영화니까요. 대선 후유증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 기분 참 좋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성공한 개혁 이야기보다 더 로맨틱하고 매력적인 건 어쩔 수 없죠. 이야기의 재미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영화의 매력 상당부분은 일부러 만들었어도 이러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고 재미있는 캐릭터 묘사에 있습니다. 미치광이 왕, 그에게 버려진 똑똑한 십대 소녀인 왕비,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이상주의자인 의사는 진짜 고전 비극에서 가져온 것 같죠.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이차원적인 캐리커처가 아닙니다. 심지어 처음엔 어릿광대/악역 같았던 크리스티안 7세도 의외로 관객들의 동정을 얻는 부분이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교만,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 엇갈리며 만들어내는 그들의 비극에도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고요.

영화는 느리고 신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냥 자기에게 맞는 페이스를 찾아내서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기술적이거나 형식적인 도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으면서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겠죠. 쓸데없이 양념을 치는 것보다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12/12/24) 

★★★☆

기타등등
이들의 이야기는 비극이지만, 그래도 덴마크 역사 전체를 통해 놓고 보면 해피엔딩입니다. 슈트루엔제의 개혁은 나중에 크리스티안 7세의 아들 프레데릭 6세에 의해 다시 부활했으니까요. 하지만 요새 전 심술이 나서 "죽은 뒤의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나"하고 투덜거리게 됩니다. 

감독: Nikolaj Arcel, 배우: Alicia Vikander, Mads Mikkelsen, Mikkel Boe Følsgaard, Trine Dyrholm, David Dencik, Thomas W. Gabrielsson, Cyron Melville, Bent Mejding, Harriet Walter, 다른 제목: A Royal Affair

IMDb http://www.imdb.com/title/tt127641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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