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라이스 버로스의 처녀작 [화성의 공주]는 그 이후로 이어지는 버로스의 판타지/SF 소설의 모델이 되었고, 플레너터리 로맨스 장르의 시조이고, H.P. 러브크래프트, 레이 브래드베리, 아서 C. 클라크와 같은 후배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하여간 중요한 책입니다. 여기서 진짜로 중요한 건 이 책이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동서추리문고(거기 제목은 [화성의 프린세스]였지요)로 읽었던 수많은 애독서 중 하나였다는 거죠.

이 소설을 각색한 앤드루 스탠튼의 [존 카터]는 소설 출판 백 주년 기념작인데, 이게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반반이겠죠. 꽤 오래 전부터 기획되었던 작품이라 원래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2012년이 가까워지자 백 주년을 맞추는 게 중요해진 게 아닐까요.

그렇게 충실한 각색물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화성의 공주]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버로스의 다른 화성 소설들에서 이것 저것을 가져오고 고쳐서 이야기를 새로 만들었죠. 그래도 그렇게 낯설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 장교였던 존 카터가 갑자기 화성으로 날아가 팔이 네 개인 초록 화성인들을 만나고 헬리움의 공주 데자 토리스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있으니까요.

현대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이야기는 쉽게 뻔해보일 수도 있습니다. 버로스의 소설에서 수많은 것들이 나오긴 했지만, 바로 그 후배들의 작품을 먼저 접하고 버로스 원작의 영화를 보면 그 '원조다움'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이 영화는 버로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기도 하지만 그 후배들의 영향 아래 있기도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전 그래도 원작을 인식하며 영화를 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영화에서 초록 화성인들이 등장했을 때 가슴 어딘가를 바늘로 쿡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 시절 [화성의 공주]의 독자였던 사람들이겠죠. 그래요. 지금 부랴부랴 읽는 독자들은 또 그 맛을 못 느낄 거예요. 어쩔 수 없지.

하여간 영화는 고풍스럽습니다. 40년대 할리우드 고전 액션영화스러운데, 등장인물 설정은 살짝 더 현대적이고, 특수효과나 액션이 [아바타]스러운 영화를 생각해보세요. [존 카터]가 그런 영화입니다. 마이클 지아키노의 음악도 참으로 옛날 할리우드스럽고요. 모험적인 스토리는 아니지만 존 카터의 이야기가 너무 엣지있으면 그게 오히려 괴상하지요. 예스러운 건 예스러운대로 두는 게 좋습니다.

3D 아이맥스의 스펙터클에는 전 만족했습니다. 입체감은 [아바타]보다 살짝 두드러지는 정도인데, 그 정도면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지만 좋죠. 아이맥스 화면에 펼쳐지는 바숨은 제가 머릿속에 그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붉은 화성인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만 빼면요. 하지만 여러분은 진짜로 데자 토리스의 누드를 기대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저도 버로스의 그 설정은 과한 것 같아요. (12/02/29) 

★★★

기타등등
보면서 칼 세이건이 이 영화를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했죠. 그 사람도 어린 시절 버로스 팬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코넬 대학의 사무실 복도 벽에 바숨 지도를 걸어놨다죠.


감독: Andrew Stanton, 출연: Taylor Kitsch, Lynn Collins, Samantha Morton, Willem Dafoe, Thomas Haden Church, Mark Strong, Ciarán Hinds, Dominic West, James Purefoy, Bryan Cranston, Polly Walker, Daryl Sabara

IMDb http://www.imdb.com/title/tt040172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678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