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저널리스트 겸 미술상이었던 앙리-피에르 로셰는 일흔을 한참 넘겨서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그가 소설가로 기억되고 있는 건 말년에 그가 잠시 알고 지냈던 영화광 청년 프랑수아 트뤼포가 로셰의 사후에 그의 소설 두 편을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 두 편이 [쥘과 짐]과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준 선물 모두가 만만치 않은 셈입니다.

트뤼포가 각색한 로셰의 두 소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적대감이 없는 삼각관계죠. [쥘과 짐]이 한 여자를 사랑하는 친구들 이야기라면,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자매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다들 참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죠. 연적에 대한 경쟁심이나 증오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더욱 복잡합니다.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의 시대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년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 정도로 보입니다. 프랑스인 청년 클로드는 프랑스에 온 조각가 지망생 앤 브라운을 만나 친구가 되는데, 앤은 클로드를 웨일즈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그러니까 제목이 아주 맞는 편이 아니죠. 이들 자매는 잉글랜드가 아닌 웨일즈 출신이니까). 클로드는 앤의 동생 뮤리엘을 사랑하게 되는데, 어머니의 반대로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1년 간 유예기간을 두기로 합니다. 프랑스로 돌아와 미술상 일을 시작한 클로드는 다시 프랑스에 온 앤을 만나는데, 그만 앤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영화 속에서 뮤리엘이 언급한 것처럼, 이들의 관계는 뮤지컬 체어 게임과 많이 닮았습니다. 세 사람이 늘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사랑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을 돌려주는 경우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웨일즈와 프랑스를 오가며 10년 동안 계속되다보니 당사자들 자신도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죠.

[쥘과 짐]과 비교하면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조금 가라앉은 편입니다. 원작은 둘 다 노인의 작품이지만, [쥘과 짐]은 젊음의 생명력이 가득하잖아요.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 이야기지만 이들은 보다 어른처럼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른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그들이 더 올바른 선택을 한다거나 현명하다는 건 아닙니다. 제 생각에 이런 차이가 나는 건, [쥘과 짐]에서 삼각관계의 중심인 카트린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미지의 존재로 남는 것과는 달리,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의 주인공 클로드는 속이 빤히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삼각관계의 역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겁니다. 물론 트뤼포가 그 동안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 것도 있죠. 그거야 당연한 거고.

[쥘과 짐]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도 여자주인공(들)에게 매료되어 있습니다. 앤과 뮤리엘은 사랑하기는 쉬워도 관계를 맺기는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지적이고, 지나치게 예술적이고,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지나치게... 영국적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프랑스 사람들이 '영국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매혹을 모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로셰의 원작이 어땠는지 몰라도, 트뤼포가 이 두 자매를 브론테 자매에 대입시키고 있는 건 분명하고요. 웨일즈에 있는 브라운 가족의 집에는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고, 자매 중 한 명은 에밀리 브론테가 실제로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아마 열광적인 독서가였던 트뤼포가 (번역으로만 읽었던) 영문학 소설과 작가들에게 바친 러브 레터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이 [쥘과 짐]에 비해 덜 영화적이고 지나치게 '문학각색물'처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뭐?"라고 묻고 싶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쥘과 짐]의 화려함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덜 영화적이라는 말이 될까요? 많은 사람들은 ([쥘과 짐]에도 있는!) 트뤼포의 내레이션에 질색을 하는데, 조금 참을성 있게 들여다보는 게 어떻습니까? 소설의 지문과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전혀 역할이 다릅니다. 지문은 상황을 설명하지만, 내레이션은 꾸준히 영화에 개입하고, 일부러 리듬감을 깨트리며, 원작인 소설과 각색물인 영화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일깨우지요. 심지어 트뤼포는 자신의 내레이션을 정통적인 문학각색물 내레이션처럼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가 건들건들 빠른 속도로 읽어가는 내레이션은 오히려 책 읽어주는 사람에 낭독에 가깝지요.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문학각색물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전형적인 문학각색물의 언어와 정반대인 경우가 많으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할 것들입니다.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아름다운 캐릭터와 깊이 있는 러브스토리, 풍성한 소재와 주제가 가득 찬 보고입니다. [쥘과 짐]의 반짝임이 없다고 해서 이 작품이 그보다 떨어지는 건 아니에요.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은 단지 [쥘과 짐]이 이야기하지 않았고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더 냉정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에필로그에서 클로드가 내뱉는 '아, 나는 정말 늙어보이는구나'라는 한탄은 [쥘과 짐]을 찍던 당시 20대 후반의 트뤼포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겠죠. (12/07/07) 

★★★★

기타등등
1.  이번 프랑수아 트뤼포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 감독판은 실질적으로 트뤼포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트뤼포는 이 영화의 감독판을 편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떴습니다. 

2. 언제나 이 영화에 브라운 자매로 나온 배우들에 대해 궁금했었죠. 앤 역의 키카 마컴은 코린 레드그레이브의 두 번째 아내였고, 뮤리엘 역의 스테이시 텐드터는 2008년에 세상을 떴더군요. 두 사람 모두 텔레비전에서 주로 활동했고요.

감독: François Truffaut, 출연: Jean-Pierre Léaud, Kika Markham, Stacey Tendeter, Sylvia Marriott, Marie Mansart, Philippe Léotard, Irène Tunc, Mark Peterson,  다른 제목: Two English Girls, Two English Girls and the Continent, Anne and Muriel, 사랑의 에튜드 

IMDb http://www.imdb.com/title/tt006698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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