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캔터빌 가의 유령]은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등 중 하나입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무시무시한 유령 이야기를 기대하며 읽었던 소설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코미디로 전환했을 때 제가 받았던 충격을 생각해보세요. 물론 저도 그 뒤로 이런 이야기와 감수성에 익숙해져서, 그 때의 독서 경험을 다시 누릴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지금 처음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겠죠.

제대로 영화화된 작품이 별로 없습니다. 극장용 영화로는 오늘 소개할 줄스 다신의 영화 정도가 알려져 있고, 텔레비전 영화로는 알리사 밀라노와 존 길거드가 나왔던 영화가 그나마 유명한 편인데, 모두 와일드의 원작이 가진 날카로운 유머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줄스 다신 버전은 유령의 기원부터 바꾸었습니다. 찰스 로튼이 연기하는 사이먼 드 캔터빌은 결투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산채로 벽 안에 갇힙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캔터빌 성을 떠돌며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데, 그가 이 비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캔터빌 가의 남자 후손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용감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태어난 남자 후손들은 모두 겁쟁이들 뿐이죠.

여기서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건너 뜁니다. 네, 오스카 와일드의 고전이 군인들 사기진작용 공익영화의 소재가 된 것이죠. 이제 캔터빌 가의 주인은 곧 일곱 살이 되는 레이디 제시카 드 캔터빌, 마가렛 오브라이언입니다. 성은 전쟁을 하러 유럽에 온 미군들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는데, 이들 중에는 캔터빌 가의 후예일 수도 있는 커피 윌리엄스(로버트 영)도 있습니다.

자, 이제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이 보일 겁니다. 유령은 새로 온 손님들을 겁주려 나왔다가 용감한 군인들에 의해 오히려 겁을 먹고 달아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령은 커피 윌리엄스와 레이디 제시카를 만나게 되고 이들은 커피 윌리엄스가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면 저주가 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문제가 있자면 커피 윌리엄스 자신도 그렇게 용감한 군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게 중심이 옮겨질 수밖에 없는 영화지요. 유령의 이야기는 대폭 축소됩니다. 처음부터 겁쟁이 유령으로 출발하는 이야기이니 호러와 코미디의 장르 충돌도 있을 수 없죠. 이야기의 일관성도 떨어지고요. 다들 겁쟁이라는 걸 아는 유령이 무서워봐야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늙은 영국과 젊은 미국의 대립도 약해졌습니다. 커피 윌리엄스가 주로 상대하는 건 유령이 아니라 귀여운 마가렛 오브라이언이니까요.

물론 여기서 주인공 역할, 그러니까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은 커피 윌리엄스입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공익영화라고. 날카로움과 유머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해없는 2차세계대전 영화입니다.

찰스 로튼의 유령은 감상적이고 멍청한 바보지만, 그래도 노련하고 다채롭게 연기된 바보입니다.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로 어린 안주인 역할을 하는 마가렛 오브라이언은 당연히 귀여울 수밖에 없고요. 로버트 영은 그냥 심심한데, 이 역할을 맡은 배우까지 존재감이 컸다면 이야기는 더 망가졌을 겁니다. 유령은 더 불쌍해졌을 거고. (12/05/13) 

★★☆

기타등등
1. 이 영화의 원래 감독은 노먼 Z. 맥러드. 하지만 38일 찍고 나서 줄스 다신으로 교체되었답니다. 의견차라고는 하지만 찰스 로튼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

2. 피터 로포드가 사이몬 드 캔터빌의 동생으로 잠시 나오는데, 애가 참 재수가 없습니다. 

감독: Jules Dassin, 출연: Charles Laughton, Margaret O'Brien, Robert Young, William Gargan, Reginald Owen, Rags Ragland, Una O'Connor, Donald Stuart, Elisabeth Risdon

IMDb http://www.imdb.com/title/tt0036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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