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Kaze tachinu (2013)

2013.09.04 00:00

DJUNA 조회 수:22470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를 보면서 계속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에야 답을 얻었습니다. 리처드 파인만. [바람이 분다]의 이야기는 리처드 파인만의 젊은 시절 이야기와 거의 똑같아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불치병에 걸린 여자와 결혼한 남자가 엄청난 무기를 만든다는 이야기. 여담이지만 파인만의 이야기는 매튜 브로데릭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죠.

그렇다고 [바람이 분다]의 이야기를 리처드 파인만의 이야기와 1대일 대칭으로 놓고 볼 수는 없습니다. 파인만과 그의 첫 아내 알린의 이야기는 실화죠. 하지만 이 영화가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제로센 전투기의 설계자인 엔지니어 호리코시 지로는 영화가 그린 것과 같은 연애는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연애 파트는 호리 타츠오라는 작가가 쓴 자전적 소설 [바람이 분다]에서 가져왔다니까요. 두 사람의 인생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 하나로 만난 것이죠.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는 러브 스토리에 대단한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고, 그건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적으로 구성된 몇몇 매혹적인 장면들이 있긴 해요. 하지만 이야기는 피상적이고 주인공들의 마음을 읽거나 공감하기는 어렵습니다. 문학적 감수성엔 신경 쓰지 않고 덤덤하게 친구에게 받아쓰기를 시킨 파인만의 회고록에서 느낄 수 있는 절절한 감정은 없어요.

[바람이 분다]는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모험을 따라가는 대신 한 남자의 반평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놉시스만 보면 굳이 이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애니메이션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런 각본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평생 동안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던 사람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에 바탕을 둔 영화입니다.

실제 역사 속의 실제 인물을 다룬 영화지만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판타지입니다. 대부분 판타지는 지로의 머릿속에서 일어나죠. 그는 온갖 날틀들이 날아다니는 비행의 꿈을 꾸고 종종 그의 영웅인 이탈리아의 비행기 제작자인 카프로니 백작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호텔에서 만난 독일인 한스 카스트로프는 아마도 영화에서도 언급되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주인공일 테니, 그것도 판타지인 것은 마찬가지겠죠.

이 판타지를 지배하는 것은 강한 서구지향과 탐미주의입니다. 둘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죠.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한 점으로 수렴됩니다. 지로는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 속에 은근슬쩍 묻어버립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가 만든 비행기들이 단 한 대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그가 느끼는 건 회한이나 분노가 아닌 탐미주의에 바탕을 둔 아련한 감상입니다.

정말 호리코시 지로가 그런 인물이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이 묘사가 꽤 정확하다고 봅니다. 영화 속의 지로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도 상당히 많이 있고 영화는 그런 인물들의 심리를 상당히 정확히 그립니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로의 목소리를 연기한 안노 히데아키의 덤덤한 목소리도 이 묘사에 정확하게 어울리고요.

하지만 아무리 지로가 정확하게 그려진 인물이라고 해도 영화가 그 옆에 머물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지로가 거쳐온 역사는 그렇게 대충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지로 개인이 어떤 깨달음에 도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봉사했던 시스템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줄 필요는 있죠. 지금 일본의 위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요. [바람의 분다]는 그리는 역사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고 그 때문에 무책임해 보입니다.

며칠 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퇴 선언을 했습니다. 전에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현장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바람이 분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틀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종종 아름다운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유감스러운 백조의 노래입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려 할 때도 늘 [바람이 분다]의 희미한 기억이 따라붙을 거 같아요. (13/09/04)

★★☆

기타등등
국내 영화 홍보에서 제로센 이야기가 빠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비겁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감독: Hayao Miyazaki, 배우: Hideaki Anno, Mirai Shida, Jun Kunimura, Hidetoshi Nishijima, Mansai Nomura, Keiko Takeshita, Miori Takimoto, 다른 제목: The Wind Rises

IMDb http://www.imdb.com/title/tt2013293/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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