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이론 (2010)

2010.02.18 09:13

DJUNA 조회 수:9511

 

보도자료를 읽어보니 [평행이론]이라는 영화의 아이디어는 프랭크 조셉이라는 사람의 책에서 나온 모양이더군요? 그 이전에도 링컨 -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우연의 일치는 유명했지만요. 하여간 조셉은 싱크로니시티와 관련된 책을 한 권 썼고, 이것이 일본과 인터넷과 엉성한 번역(들)과 [신기한 TV 서프라이즈]를 거치면서 [평행이론]이라는 영화의 아이디어를 이룬 모양인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정보들이 손실되고 추가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들이 원본 소스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죠. '케네디가 죽기 일주일 전에 마릴린 먼로와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예고편에 올려놓고 있고, 조셉이 자신과 평행인생을 산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그나티우스 L. 도널리의 이름도 보도자료에서는 그냥 '이쿠나치우스'라고 적어놓고 있으니까요.

 

하여간 이 영화의 개념은 자연 세계에 일종의 흐름과 리듬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살았던 특정한 사람의 인생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링컨과 케네디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것은 막 우리나라 최연소 부장판사가 된 우리의 주인공 김석현에겐 나쁜 소식입니다. 그의 인생은 꼭 30년 전 그와 같은 나이에 최연소 부장판사가 된 한상준의 삶과 겹쳐지는데, 그 한상준이라는 남자는 부장판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를 잃었고 당시 사건의 범인이 도주해 16일 뒤 그와 아들을 살해했단 말입니다. 실제로 그의 아내는 한상준의 아내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상황에서 살해당하자, 김석현은 어떻게든 이 예정된 운명을 막기 위해 뛰어다닙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퍼즐 게임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이미 해답이 있는 퀴즈 같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범인도 아니까요. 하지만 당시 언론과 재판 기록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고, 실제로 김석현이 당시 사건을 캐보니 별별 더러운 진실들이 잔뜩 나옵니다. 16일이 지나기 전까지 그가 진상을 완벽하게 밝혀내지 않는다면 그와 딸 예진은 죽습니다. 한 번 도전해볼 만한 과제이고 흥미로운 미스터리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게임의 기본 규칙일뿐입니다. 이 게임을 제대로 하려면 규칙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 게임이 제대로 된 드라마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거죠. 이 점에서 영화 [평행이론]은 시작부터 실패했습니다.

 

영화는 가장 중요한 도입부 부분에서부터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테마가 되는 '평행이론'이 등장하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가는 과정이 필수라는 거죠.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그 평행이론이라는 것을 등장시켜버립니다. 자신이 괴델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고 믿는 수학자를 등장시켜 개념 전체를 공표해버리죠.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영화 속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 전원이 평행이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석현의 아내 윤경이 살해당하자마자 김석현은 '평행이론' 아이디어를 덜썩 물어버립니다. 그렇게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판사 일을 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뒤부터 미스터리도 나오고 탐정일도 나오지만 재미있는 건 별로 없습니다. 평행이론은 거의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단서들은 거의 공개적으로 주어지며, 배배 꼬아놓은 사건의 진상은 심각할 정도로 익숙합니다. 이 영화의 반전을 보고 놀라려면 지난 20년 동안 산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이 반전을 신주 모시듯 합니다. 더 나쁜 건 평행이론이라는 게임을 만들어 놓고 그 규칙을 깨거나 넘어서려는 시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석현은 영화 내내 그냥 생각이 없습니다. 특히 딸의 목숨이 달린 마지막 날에는요. '반전'이 밝혀지면서 끝나는 결말을 보면 이 영화를 극장에서 트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이 영화에는 드라마가 없습니다. 최소한 주인공이 상황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다는 티라도 내야 드라마라는 게 생기지 않겠습니까. 

 

스릴러 영화로서 [평행이론]은 재미가 없습니다. 일단 사용되는 도구들 반이상이 뻔한 클리셰들의 무한 반복입니다. 여기에는 관객들을 오도하는 교차 편집,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듣자마자 작업을 멈추는 손, 고뇌하는 남자 주인공의 샤워 등이 포함됩니다. 3인칭 대명사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문어체 대사는 어색하고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나쁩니다. 나름 야심차게 삽입한 하정우의 특별출연도 효과가 참 없어서 보기 미안할 정도입니다.

 

[평행이론]의 감독 권호영은 [어느날 갑자기: 네번째 층]을 만든 사람입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전 그 작품에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행이론]은 전작이 가지고 있던 장점들(캐릭터에 대한 이해,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페이소스)을 모두 날려버리고 마땅히 수정되어야 했던 단점들만 남겨놓은 작품입니다. 그래도 아이디어를 짤 때는 다들 희망이 컸을 텐데, 이런 결과물로 떨어지고 말았다니 슬프군요. (10/02/03)

 

★☆

 

기타등등

오지은이 경향일보 기자로 나옵니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진짜 매체의 기자가 등장하는 걸 처음 봐서 신기했습니다. 역은 대단치 않습니다. 소모성이죠. 소모성인 건 윤세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은 다 소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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