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2017)

2018.03.13 10:31

DJUNA 조회 수:9717


광화문 시네마의 네 번째 영화인 전고운의 [소공녀]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우선순위를 가진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미소는 가사도우미예요. 좋아하는 건 담배와 퇴근 후에 마시는 한 잔의 위스키. 그런데 2015년, 담배값이 두 배로 뛰고 그와 함께 집세도 올라가 버립니다. 미소는 우선순위를 놓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안 할, 그러니까 영화로 만들기 기가 막히게 좋은 선택을 합니다. 담배와 위스키를 위해 집을 포기한 거죠.

전재산을 여행 캐리어에 담은 미소는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신세를 집니다. 하지만 절대로 민폐가 될 생각이 없지요. 늘 계란 한 판을 선물로 들고 오고 집안 청소나 요리와 같은 가사일을 해주면서 잠자리 값을 하려 하지요. 미소는 두 가지 일 모두에 뛰어납니다. 좋은 아내나 엄마가 되기엔 심각한 결함이 있지만 훌륭한 룸메이트죠. 조용하고 자신의 서식지를 완벽하게 관리하는 깨끗하고 대체로 건강한 생명체.

하지만 이 계획에는 약간의 결함이 있습니다. 일단 미소에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가족도 없고 친구라고는 10년 전 대학 때 밴드하다 만난 사람들 정도죠. 웹툰작가 지망생이라는 남자친구 한솔은 공장에서 숙식하는 처지라 여자친구를 데려올 수 없고요. 어쩔 수 없이 미소는 밴드 시절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면서 신세를 지려 하는데, 이들에겐 모두 미소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거나 미소가 편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누구는 결혼했고, 누구는 지나치게 결혼을 원하고 있고, 누구는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내길 원치 않고. 그리고 이 조건들은 모두 밴드 이후 한국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흩어진 그들의 삶을 반영합니다.

그러니까 [무도회의 수첩] 비슷해요. 이건 한국 인디 영화니까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와 비교하는 게 더 그럴싸하려나. 이런 형식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소공녀]도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 쇼케이스입니다. 정말 더 이상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캐스팅된 이솜의 주변을 안재홍, 김재화, 강진아, 김예은, 조수향, 최덕문, 이성욱과 같은 배우들이 지나가면서 자신을 전시하는 거죠.

꿈도 희망도 없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게 암담한 내용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미소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까. 최소한의 사랑과 쾌락만 주어진다면 미소에게 이 삶은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경제적 상황이 압박해 와도 끝까지 자신의 서식지를 찾아내 지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결국 그것을 포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꼭 비극은 아닐 거 같고.

지금까지 나온 광화문 시네마 영화 중 최고작입니다. 줄을 세워가며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 [소공녀]에는 이 전 이 회사의 영화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시적인 아름다움과 힘이 있으며 현실에 보다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격렬하게'라는 표현이 미소나 [소공녀]라는 영화의 전체 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리긴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 아이러니 때문에 영화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죠. (18/03/13)

★★★☆

기타등등
광화문 시네마의 다음 영화는 [강시]인 모양이에요. 예고편은 그냥 강시 영화의 패러디 같은데, 정말 그게 다는 아니겠죠?


감독: 전고운, 배우: 이솜, 안재홍, 김재화, 최덕문, 강진아, 김예은, 조수향, 이성욱, 다른 제목: Microhabitat

Hancinema https://www.hancinema.net/korean_movie_Microhabitat.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9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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