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각본가 데보라 데이비스는 1998년에 이 영화의 첫 각본을 썼다고 합니다. 완성될 때까지 거의 20년이 걸린 영화죠. 설정만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제작이 늦어진 이유는 두 가지. 남자 캐릭터의 부족과 동성애 묘사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여자 셋이 나오는 삼각관계 영화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09년에 [송곳니]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에게 감독직이 넘어갔고 2013년에야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17년에야 촬영이 가능했던 건 란티모스가 원했던 배우들의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서였고요. 그 때문에 [킬링 디어]를 먼저 찍었다나. 그렇다고 하고요.

영화의 시대배경은 18세기 초 영국. 앤 여왕 때죠.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영국과 프랑스가 한참 전쟁 중이었던 때고요. 당시 궁궐의 실권은 앤의 어린 시절 친구였고 주전파인 말버러 공작의 아내인 사라 처칠이 잡고 있었죠. 그런데 사라의 먼 친척인 애비게일 힐이 일자리를 찾으러 궁궐에 나타나요. 한 번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진 적 있는 애비게일은 필사적으로 앤 여왕의 호감을 얻어가는데, 그걸 눈치 챈 사라의 정적인 토리 당의 로버트 할리가 이를 이용하기 위해 끼어듭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있는 익숙한 정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군주의 총애를 겨루는 두 사람의 이야기요. 단지 이 영화는 안 쓰던 근육을 쓰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남자 군주와 여자들의 이야기거나 남자 군주와 남자들의 이야기인데, 이 영화에서는 삼각관계에 얽힌 사람들이 모두 여자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과물이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투영된 '다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죠.

[더 페이버릿]의 세계는 성역할이 역전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세계였던 건 아니에요. 영국이 그런 나라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하지만 군주는 여자이고 그 군주와의 관계를 이용해 권력을 쥐고 있는 친구 역시 여자이며, 그 친구의 자리를 넘보는 친척 역시 여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인 동물이며 이들의 감정은 늘 권력의 추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특별히 남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아닌데, 그 행동은 사람들이 '여자답다'고 여기는 어떤 순수성에서 벗어나 있어요. 일부러 괴상하게 뒤틀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데 그와 상관없이 새롭고 다르며 그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를 일부러 과장합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건 패션과 화장인데요. 이 영화의 남자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하고 있지만 여자들은 의상과 화장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자들은 고증을 따르고 여자들이 거기서 벗어나 있는 거죠. 영화는 남자들의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고 의미를 축소하면서 심술궂은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바깥 세계에서 여전히 그들은 세계를 주무르고 있겠지만 주인공인 세 여자들에겐 별 의미가 없는 존재들인 거죠. 심지어 성적인 대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를 아주 대놓고 드러내는 섹스신도 하나 있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세 여자들이 관심을 갖는 건 모두 다른 여자들이고 유혹하고 적대하는 대상도 모두 여자들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세 여자주인공들이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 거의 미치려고 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런 관계의 캐릭터들이 여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영화가 정말 드무니 이건 당연한 거죠. 게다가 이들은 실제 역사로부터도 어느 정도 해방되어 있습니다. 다 실재했던 인물들이고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이긴 하지만, 앤 여왕은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처럼 신화화된 인물이 아니잖아요. 관객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흐릿하고, 배우들은 그 흐릿한 기대 앞에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성애도 포함되지요. 당시 세 여자들이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옛날 유럽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우리 눈엔 실제보다 더 동성애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관계의 역동성이 흥미진진하다면 적당히 그 보편적인 매력과 주제를 취하면서 받아들이는 거죠. 이들은 분명 역사속 인물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겠지만 어차피 우린 실제 앤 여왕과 사라 처칠과 애비게일 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끝까지 알 수 없을 테니까요. (19/02/25)

★★★☆

기타등등
오늘 있었던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은 앤 여왕 역의 올리비아 콜먼에게 돌아갔습니다. 박수.


감독: Yorgos Lanthimos, 배우: Olivia Colman, Emma Stone, Rachel Weisz, Nicholas Hoult, Joe Alwyn

IMDb https://www.imdb.com/title/tt5083738/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8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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