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Vision - Aus Dem Leben Der Hildegard Von Bingen (2009)

2010.04.22 14:11

DJUNA 조회 수:8765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중세시대 엄친딸이죠. 신이 내린 비전을 본 신비주의자 겸 신학자이기도 했지만, 자연에 매료된 과학자이자 의사이기도 했으며, 오페라의 전신을 작곡한 클래식 작곡가이기도 했어요. 이 사람의 명성은 오히려 최근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앨범들은 베스트셀러이고, 책들은 페미니스트나 환경운동가들에겐 금광과도 같지요.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전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품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폰 트로타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남성위주의 역사 뒤에 숨겨져 있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전면으로 끌어내는 데에 집중해왔지요. 힐데가르트 폰 빙엔에 이 사람의 손이 닿는 건 시간 문제였던 겁니다.


[비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영화는 가톨릭 신앙이나 신비주의에 큰 관심은 없습니다. 영화는 비전이나 신앙심보다는 그로 인해 발생한 개인의 영향력에 주목을 해요. 힐데가르트는 수녀원장이 되고 비전을 보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데, 몸이 약하고 낯을 가리던 이 인물은 그와 함께 슬슬 정치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합니다. 수녀원장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자신을 편리한 소유물 취급을 하던 수도원으로부터 독립하고,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힘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고, 참 열심히 삽니다. 생산성도 어마어마하고요.


이 이야기들이 모두 재미있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한 마디로 지나치게 잘 났어요. 진짜 엄친 딸이지요. 가끔 시련도 닥치고 위기도 발생하지만, 이런 것들에 오래 눌리기엔 주인공이 너무 똑똑합니다. 그 때문에 보고 있으면 통쾌하긴 해요. 하지만 그로 인해 드라마가 다소 얄팍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우린 모두 우리의 수퍼스타 수녀원장님이 이 모든 걸 다 이겨내고 승자로 군림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이 천재의 가면을 벗고 인간적 약점을 드러낼 때입니다. 특히 애제자의 리햐르디스와의 관계가 그래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천재 수녀는 이기적이고 치졸하기까지한 연상의 연인처럼 행동합니다. 그 관계 때문에 겪는 고통도 크고요. 당연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 잘난 인물이 바닥까지 치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래도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바닥은 우리 대부분의 꼭대기보다 높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사람은 여전히 잘 났습니다. 그리고 징그러울 정도로 신나고 즐겁게 살았어요. 부러워죽겠습니다. (10/04/20)


★★★


기타등등

바르바라 수코바는 수녀복을 입으니 나이를 읽을 수가 없더군요. 이 사람도 벌써 올해로 환갑. 


감독: Margarethe von Trotta 출연: Barbara Sukowa, Heino Ferch, Hannah Herzsprung, Gerald Alexander Held, Lena Stolze, Sunnyi Me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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