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1973)

2014.01.30 22:49

DJUNA 조회 수:7410


리 브라켓 각색의 필립 말로 영화. 이렇게만 설명하면 여러분은 험프리 보가트가 필립 말로로 나오는 40년대 흑백영화를 상상하실 겁니다. 실제로 그런 영화가 있죠. 브라켓이 윌리엄 포크너와 같이 각색한 [빅 슬립]. 하지만 [기나긴 이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입니다. 로버트 올트먼이 감독하고 엘리엇 굴드가 주연한 1973년작인데 시대극이 아니죠.

당연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필립 말로는 배트맨이 아닙니다. 다른 시대로 쉽게 옮겨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죠.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철저하게 4,50년대 미국 남성의 환상 속에 갇혀 있습니다. 십년만 뒤로 옮겨도 모든 게 허물어지죠. 그런데 20년이라? 생각해보세요. 1953년의 캘리포니아와 1973년의 캘리포니아는 전혀 다른 우주입니다. 말로가 이 시대와 장소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이런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 척 합니다. 그에게 챈들러의 말로가 탔을 법한 옛날 차를 주고 챈들러의 소설에 나왔던 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하지요. 친구 테리 레녹스를 공항에 데려가주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는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쫓기고 있었고 나중에 멕시코에서 자살을 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말로는 알코올 중독자인 베스트셀러 작가 로저 웨이드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데... 기타등등...

하지만 암만 스크린을 노려봐도 엘리엇 굴드의 말로에겐 챈들러의 말로가 가진 나르시시즘은 느낄 수 없습니다. 굴드의 말로도 냉소적이긴 하지만 그의 냉소는 챈들러의 냉소와는 종류가 다릅니다. 챈들러의 말로가 가진 냉소는 굳건한 자기확신에서 옵니다. 하지만 굴드의 말로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다소 정신 사나운 남자입니다. 그는 말로라기보다는 말로를 흉내내는 익살스러운 코미디언처럼 보입니다.

헐벗은 히피 언니들을 이웃으로 둔 아파트의 주민인 말로가 배고프다고 보채는 고양이의 밥을 사러 새벽 3시에 동네 마트로 나가는 부분부터 영화는 원작과 따로 놉니다. 그 뒤부터 말로의 모험에 배경을 제공해주는 70년대 캘리포니아는 아무리 굴드의 말로가 원작의 말로에 충실하려고 해도 협조해주지 않습니다. 저음으로 으르렁거리는 중절모 쓴 남자들도 없고 로렌 바콜 같은 40년대 미인도 없는 걸요.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알록달록한 옷을 차려입고 꼼꼼하게 건강을 챙기는 70년대 캘리포니아 주민들입니다.

여기서 진짜로 말로를, 아니, 챈들러의 이야기를 사보타지하고 있는 건 70년대의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브라켓과 올트먼입니다. 특히 브라켓요. 척 봐도 브라켓은 챈들러의 소설을 거의 경멸합니다. 각색가로서 브라켓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챈들러의 우선순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브라켓은 챈들러가 거의 기능성 도구로 심었던 범인을 빼돌리고 사전 진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챈들러가 로맨틱하게 묘사한 말로와 테리 레녹스의 우정을 최대한 경박하고 차갑게 그렸어요. 브라켓이 바꾼 결말은 챈들러의 소설에 침을 뱉는 것과 비슷한 행위로 보일 정도입니다.

이렇게 브라켓이 기초를 다지면 올트먼이 신나게 동참합니다. 심지어 올트먼은 테리 레녹스 역에 진짜 배우를 캐스팅하지도 않았어요. 전직 야구선수를 데려와 발연기를 시켰지요. 소문에 따르면 올트먼은 챈들러의 소설 자체보다는 그가 쓴 일기나 편지를 통해 얻은 챈들러에 대한 정보를 영화에 반영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영화를 필름 느와르보다는 코미디에 가깝게 만들었지요. 어떻게 봐도 [기나긴 이별]은 필름 느와르가 아니라 필름 느와르의 패러디입니다.

이래 놨으니 챈들러 팬들이 영화를 보고 분노하고 흥행에도 실패하는 건 당연한 일. 저는 이 영화를 챈들러의 원작에 대한 익살스러운 비평으로 보고 즐겼지만, 원작의 정서에 충실한 각색물을 찾는 챈들러의 팬이라면 다른 영화를 고르는 게 낫겠습니다. (14/01/30)

★★★

기타등등
1. 생각해보니 [빅 슬립]도 영화와 소설의 진상이 다르죠. 이 영화에서는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2.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자막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번역하고 있던데, 당시 레이건은 아직 대통령이 아니었죠. 73년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3. 무명 시절의 아놀드 슈왈제네거, 그러니까 미래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양반이 대사 없는 단역으로 나옵니다.

4. 존 윌리엄스가 이 영화를 위해 [기나긴 이별]이라는 주제가를 작곡했는데, 온갖 모양으로 편곡되어 정말 끝도 없이 나옵니다. 심지어 초인종 벨소리도 주제가의 일부를 따서 쓰고 있어요. 농담이었겠죠.


감독: Robert Altman, 출연: Elliott Gould, Nina van Pallandt, Sterling Hayden, Mark Rydell, Henry Gibson, David Arkin, Jim Bouton

IMDb http://www.imdb.com/title/tt007033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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