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메이커 (2012)

2012.01.03 23:50

DJUNA 조회 수:14562


페이스 메이커는 마라톤이나 수영 같은 경기에서 우승 후보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투입되는 선수입니다. 영화를 보니 대충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겠더군요. 하지만 얼마나 그 역할이 중요한 것인지, 그 역할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핸디캡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도자료를 읽어보니 황영조 선수도 페이스 메이커였다는데요? 페이스 메이커로 뛰었다가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꽤 많은 모양입니다. 하여간 스포츠 멜로드라마 소재로는 이상적입니다.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한 보조 역할만 하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경기를 뛴다니 그 상징성만 해도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영화의 주인공 주만호는 (당연한 거지만) 페이스 메이커입니다. 사실 영화가 시작될 무렵엔 페이스 메이커도 아니죠. 그는 옛 동료의 치킨집에 얹혀 지내면서 월급 50만원 받고 배달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현역이 아니고 나이가 들었고 오른쪽 다리 상태가 나쁘며 뛰는 거 이외에는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다 그는 옛 코치인 박성일로부터 금메달 유망주 민윤기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별 생각 없이 그는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주변 후배들이 그를 보는 눈도 그리 좋지 않고 그 역시 이전과는 달리 생각이 복잡합니다. 언제까지 그가 남을 위해서만 달려야 합니까. 마라톤 선수라면 30km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요.


이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페이스 메이커]는 그 중 가장 쉬운 길을 택합니다. 신파죠. 한국식 신파.


주만호의 캐릭터만 봐도 이 영화가 갈 방향이 보입니다. 그는 한국 영화의 단골 주인공인 바보 성자입니다. 머리 좋고 공부 잘 하는 동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어리석고 착한 형요. [천국의 아이들]을 흉내낸 어린 시절 회상 장면만 봐도 영화가 이 사람을 어떤 인물로 만들려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화의 설정상 언제까지 희생만 하는 인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다고 그가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주 편리하게 조작된 멜로드라마의 도구입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친구들, 동료들, 가족들 모두 그의 캐릭터를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갑니다. 이러니 영화의 흐름도 조금 괴상해집니다. 주만호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그리는 우주의 중심이지요. 심지어 그와 친구가 된 잘 나가는 스포츠 스타 유지원에게도 그렇습니다. 이런 설정은 이야기를 수월하게 만들지만 정작 그러는 동안 주인공의 주체성까지 희박해져버리니 문제입니다.


영화가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를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심각한 옥에 티들을 지적하던데, 전 몰랐고 눈치채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멜로드라마의 재료로서 마라톤을 얼마나 잘 썼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갑니다. 한마디로 관객들의 감정을 쥐어 짜려는 의도가 너무 잘 보입니다. 아마 많은 관객들에게 먹힐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그냥 감정적으로 주인공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채, 시나리오 작가들이 이미 정해진 기성품 결말들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희미하게 궁금해하기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가 그리는 2012 런던 올림픽은 전혀 진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명민의 연기에 대해서 말하라면... 그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하고 잘 합니다.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의치를 끼고 외모도 바꾸고 몸도 만들었어요. 그가 캐릭터를 방치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명)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금 피곤해요. 영화 보는 동안 그의 연기를 인식하지 않는 순간이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안성기는 언제나처럼 안성기이고, 고아라는 예쁘고 신선한데 김명민과 그렇게 억지로 연결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충 해도 될 텐데 너무 밀어붙이니까 아저씨들의 소망성취처럼 보여요.


[페이스 메이커]의 가장 좋은 점은 그 속도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골오골하고 뻔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주저하거나 속도를 잃지는 않죠. 후반부에서는 심각한 신파에 빠지지만 (빨간 우산 장면은 너무 심했습니다!)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흥미로운 객관성의 흔적도 보여요. 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였을 거예요. 탈출구가 별로 없는 장르니까. (12/01/03)


★★☆


기타등등

김명민은 의치를 끼고 달릴 때 신기할 정도로 유재석 닮아 보여요.  

 

감독: 김달중, 출연: 김명민, 안성기, 고아라, 최태준, 최재웅, 조희봉, 이율, 이엘, 이봉주, 다른 제목: Pace Maker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Pacemaker.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3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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